1934년 유치진의 도일은 극예술연구회에 심각한 충격을 가한 사건은 아니었다. 유치진이 도일한 이후에도 극예술연구회는 운영 기조를 잃지 않았고, 그러한 기조는 서구번역극을 중심으로 한 공연에 익숙한 운영진에게는 일종의 성공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35년에 들어서면서 극예술연구회의 정기공연이 차질을 빚게 되면서, 기존의 운영 정책에 변화가 가미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국내 작가의 창작희곡 공연 계획과 신진 세대의 신예 작품 발굴이었다. 유치진은 이러한 변화와 신진 세대의 등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유치진의 내면 풍경을 살펴보면서, 1935년 조선 연극계에서 극예술연구회가 지닌 입지와 비교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치진의 의도는 귀국한 조선 연극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의도와 맞물렸지만, 이러한 의도로 인해 극예술연구회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재 등용은 한계에 직면하고 결국 극예술연구회는 하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