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山 法基里 窯址는 사적 제100호로서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高麗茶碗은 일본에서 조선시대 사발을 아우러는 용어이다.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수습된 사금파리를 통해 자기의 樣態, 文樣 등이 일본에 다수 존재하는 고려다완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양산 법기리 요지 관련 문헌자료를 재검토한 결과 첫째, 조선 전기의 지리지 분석을 통해 동래를 비롯해 양산, 김해 등지에서 도기와 자기가 생산되어 왜관 인근 지역에서 다양한 가마가 존재하였다. 둘째, 절영도 임시왜관 시기부터 두모포 왜관에 가마가 설치되기 직전까지는 왜관 밖 가마에서 자기가 주문 제작되었다. 셋째, 일본은 제작 의뢰 뿐 아니라 公私 교역을 통해서도 자기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598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자기 수요에 맞추어 주문 제작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자기 가마는 동래부 관내에 위치하였는데, 양산 법기리 요지가 유력한 생산 거점으로 추정된다.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수습된 사금파리 일부를 대상으로 일본의 고려다완과 비교 분석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금파리와 고려다완은 형식 및 문양에 있어서 유사하였다. 고려다완은 일본에 의해 주문 생산된 자기이지만 조선의 흙과 사기 장인이 빚어 만든 사발이었다. 양산 법기리 요지가 바로 생산 가마였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사적지 지정 당시 정밀지표조사 또는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정되었다. 양산 법기리 요지 성격과 운용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식 발굴 및 체계적인 보존이 필요하다. 한일 공동 연구를 통해 지속적인 성과를 도출해 양산 법기리 요지에 대한 연구를 확산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