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채비는 제주 민간에서 널리 숭배된 조상신 중 하나다. 현재는 그 신앙이 극도로 음지화되어 마을 내에서 몇몇 가정들만 비밀스럽게 숭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혼인시 도채비가 딸을 따라가 남편 집을 망하게 한다는 속설 때문에 제주서는 해당 집안 여성들과의 결혼을 꺼리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본고의 주요 논지는 첫째, 이 비밀스런 가정신앙의 이면에 제주사회를 역사적으로 조건지어 온 유교이념과 실용논리의 충돌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도채비는 대장장이나 어부와 같은 공상(工商) 계층의 조상신이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제주에서 최초로 자본주의 경제에 편입된 해안마을 유지들, 다시 말해 큰 성공이나 극적인 파산의 가능성이 높았던 집단의 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여성이 혼인교환의 대상이 되는 부계출계 사회에서 20세기 이후 강력한 경제주체로 부상한 제주 여성들의 현실적 역능이 남성중심 이데올로기를 상당 수준까지 위협했으며, 그 위협이 “남편 집을 망하게 하는” 무서운 도채비 조상으로 구체화되었다는것이다.
이 연구는 제주사회의 역사적 변천 속에서 도채비를 사농공상의 생업이념과 유교적 부계출계 이념을 은밀히 위협했던 이들의 조상신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해촌(海村) 여성들이 강력한 경제주체로 부상했던 20세기 제주를 배경으로 어떻게 유교이념이 혼인이라는 내밀한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었는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