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하와이 대한인 독립운동을 이승만과 박용만을 중 심으로 분석했다. 두 인물의 개인적 갈등에만 주목하거나 현재의 정치적 평가를 과거 로 투사하는 경향을 역사정치학적으로 지양하고, 두 인물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고민 을 ‘있었던 그대로’ 규명하면서 하와이의 지정학적 특성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대표 되는 국제정치적 영향에 주목한 이 연구의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북미대륙에서 하와이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을 받은 박용 만과 이승만은 각각 군사노선과 외교・교육노선에 주력했다. 1898년 미국에 병합되었 던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군사훈련이 용인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다수의 일본계 주민 들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국제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둘째, 제1차 세계대 전 시기 박용만의 군사노선은 한계에 봉착했다. 미국과 일본이 사실상 동맹관계를 형성하면서 하와이에서 항일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셋째, 1918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9년 파리평화회의 의장을 맡고, 그의 프린스 턴대학교 제자였던 이승만이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된 대 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자 하와이 대한인들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더욱 지지 했다. 박용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고, 하와이 대신 동북아 대륙에서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소비에트 정부와도 접촉하 다 자유시참변 이후 반공노선으로 선회했던 박용만은 중화민국 군벌들에 이어 일본 과도 접촉하던 중 또 다른 노선의 독립지사 이해명(이구연)에 의해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