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살아남기’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절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시인 말 중에서
이 논문은 허수경 시의 ‘발굴의 유적지’와 ‘역’이라는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드러나는 생태적 상상력에 주목하였다. ‘다른, 낯선, 혼종의’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는 반생태적 시대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며 전쟁이나 근대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탈근대적 사유로서 생태적 상상력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움직인다.
‘발굴의 유적지’는 과거의 시간과 문화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헤테로토피아이다. 역사의 지층을 파헤치며 고대인들의 삶을 해독하는 일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파멸과 전쟁을 의미하는 차가운 ‘청동의 시간’을 지나 땅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감자의 시간’은 생명 연대의 윤리적 실천을 모색하는 길이다. 또한 ‘역’은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장소로 다양한 사람들의 연결과 확산이 시작되는 플랫폼이다. 무엇보다 그곳은 내전과 종교 그리고 인종차별 등으로 목숨을 걸고 고국을 탈출한 난민들의 공연과 숙박의 장소로 국경 없는 연대의 헤테로토피아이다.
이처럼 탈근대적 전망으로서 허수경 시에 드러나는 두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드러나는 생태적 상상력은 공존과 상생 그리고 저항으로서의 생명 연대를 의미한다. 허수경이 스스로 생태적 삶을 살며 모국어로 한 편 한 편의 시를 쓴 것은 미학적인 차원과 실천적인 차원으로서의 생태 위기에 대한 고찰과 시적 대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