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근대초기 시조담론을 대상으로 하여 시조의 변이양상과 시조에 대한 인식 변화를 고찰하고자 한다.
최남선은 노래로서 시조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성률’에 능통해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작품에서는 ‘성률’을 배제하여 노래가 아닌 ‘시’로서 읽을 것을 제안했다. 최남선 작품 중 소년지에서 실린 시조는 종구가 생략된 시조창에 형식적 기반을 두고 창작하였다. 그러나 청춘지에서는 가곡창 중 ‘평조’를 형식적 기반으로 하여 창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라졌던 시조의 종장의 종구가 되살아나게 되었고, 평시조와 연시조의 형식으로 창작되어 정형시로서 시조를 창작하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반면 최영년은 가곡창 중 평조, 남창시조 등 다양한 곡조를 기반으로 시조를 창작함으로써 시조를 노래로서 인식하였고, 평시조·사설시조의 형식으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때 지향했던 유교적 덕목을 주제의식을 표현하였고 한시·고사 등을 차용하여 표현함으로써 고시조의 품격을 계승하려고자 하였다. 1900년대 대중화되고 통속적으로 향유되었던 시조를 한시와 같은 품격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대 시조는 창작 주체의 변화와 주제의식의 변화, 표현 기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시대적 변화의 양상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시조와 한시 등 다양한 장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본격적인 근대문학으로 창작되기 이전 1910년대 시조는 고시조가 지닌 시대의 변화를 담지할 수 있는형식적 유연성을 간직하고 있었고, 당대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를 표현해 내는 문화적 양식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