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의 시조 세계는 선시조를 통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세계를 궁극으로 추구한다. 선시조(禪時調)는 선(禪)과 시조의 합성어이다. 시조는 문자에 의존하는 양식이라면 선(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상반된 속성을 지닌 선(禪)과 시조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것은 조오현이 시조 장르를 통해 선(禪)의 심지를 밝혀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세계를 구현하게 된 배경과 연관된다.
이 글은 이점을 밝히기 위해 시조 장르의 속성이 성리학적 이념의 요체인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지향한다는 점을 탐색하였다. 시조가 집중하는 성리학의 이(理)의 세계는 선(禪)의 궁극에 해당하는 본래무일무(本來無一物)와 상통한다. 물론 선(禪)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성리학의 이(理)와 달리 본연지성(本然之性)의 본체마저 부정하는 절대의 차원이다.
조오현은 시조를 통해 선(禪)을 추구하는 배경이 여기에서 찾아진다. 이점은 또한 선(禪)이 그의 시조 세계의 심지이며 동시에 형식과 내용 가치의 궁극이라는 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특히 그의 이러한 시조 세계는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득의망상(得意忘象)의 미의식을 통해 구현된다. 특히 그의 득의망상의 미의식은 마음의 수행을 통해 외적 대상은 물론 내적 주체까지 무화시키는 경지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그의 득의망상의 미의식은 마음 공부로 집중된다. 여기에 이르면 그가 스스로 “중은 끝내 부처도 깨달음까지도/내동댕이쳐야하거늘/대명천지 밝은 날에/시집이 뭐냐”고 일갈하는 연유를 좀 더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지향하는 득의망상(得意忘象)의 미학에는 “깨달음”과 “부처”와 “시집”까지도 차별 없이 포괄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조가 가없이 활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