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볼트(1796-1866)는 의학계의 명문가정에서 태어나 뵈르츠부르크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였다. 이윽고 동양학 연구에 뜻을 가지게 된 그는 26세가 된 해 7월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육균 병원의 외과 소령으로 임명되어 인도네시아를 거쳐 1823년 8월에 일본에 오게 되었다. 쇄국시대의 일본의 대외 무역 창구였던 나가사키의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소속된 의사로서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의학지식을 인정받아 데지마 근교에 나루타키 학원을 개설하고 서양의학을 일본인제자에게 교수하엿다. 알려진 바로는 약 50여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가 조성한 데지마의 식물원에 주목하여 식물원 이 식민지의 강제재배정책과의 관련을 입증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가 받은 다액의 연구비의 출처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부와의 관련을 통해 시볼트d[ 대한 새로운 인물평가를 시도하였다. 특히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식물원을 조성하여 1825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부로부터 식물원으로서의 공식인가를 받은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그가 식물원을 조성하는데 어떻게 1826년의 에도여행을 활용하였는지, 식물표본을 구입한 경로와 방법, 식재의 다양한 형태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가 식물원에서 재배한 종자, 묘목, 표본을 인도네시아에 송부하였고 그 중 차의 종자가 네덜란드의 ‘강제 재배제도’와 크게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지볼트는 다액의 연구비를 수령하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총독부, 네덜란드의 식물원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가지고 있덨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인도네시아에서 시행된 식물의 강제 재배정책과 연동되어 있었으며 세계의 ‘견본시장’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볼트의 인삼에 관한 관심을 살펴보고 나가사키에서 재배가 가능한 인삼을 심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