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의 소형 전불은 남아있는 사례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전불을 제작하는데 쓰였던 〈화엄사 청동불상틀〉이 화엄사 서오층석탑 기단에서 실생활용품과 함께 발견되었고, 전라북도 김제시 대목리에서도 4점의 〈판불〉이 발견된 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대목리에서 발견된 4점의〈판불〉을 전불과 판불을 제작하는데 쓰였던 불상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도금의 흔적이 육안으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판불의 뒷면에 촉이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경상북도 경주 갑산사지에서 발견된 실물 〈전불〉도 있는데, 갑산사지에서 20㎞ 가량 떨어진 인왕동사지에서도 같은 거푸집에서 떠낸 전불이 발견된 바 있어 한국 고대에 소형 전불이 꽤 제작됐을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이 글에서는 세로×가로 크기가 10㎝를 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이들 사각형 전불이 도대체 어디에 쓰인 것인지 그 용도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
7세기 중엽 중국 장안에서 유행했던 전불은 고대 한국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출신 승려 원측(613-696)을 주목했다. 원측은 중국에서 현장과 함께 공부했으며, 전불이 다량으로 출토된 장안 서명사(西明寺)의 승려였기 때문이다. 658년 서명사가 완공된 후 원측은 대덕으로 초대되어 서명사에 머물렀지만 이후 원측은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통일신라 제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이 685-688년 무렵 여러 차례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측천무후(재위 690-705) 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측은 신라로 귀국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도증(620?-700?)은 692년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이때 도증은 그가 머물던 장안의 사찰에서 전불을 가지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전불은 당시 장안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던 데다가 휴대가 간편하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아 이동이 편리한 소형 전불은 위와 같은 사례 외에도 수많은 경로를 통해 한국 고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 글은 크기도 작고 모양도 보잘것없지만, 종교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한국 고대 소형 전불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소형 전불은 불교 신자가 불상을 ‘직접 소유’할 수 있고, 몸에 지님으로써 부처를 늘 ‘기억’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불교미술품이다. 죽은 이나 자신이 지은죄를 소멸하고 나아가 공덕을 쌓아 더욱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입장에서는 최소 비용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 불상틀로 불상을 찍어낼 때 여러 불교신자가 모여 함께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의식도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점, 나아가 이동이 간편하여 포교의 수단으로도 유용했다. 소형 전불은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라면 어디서나 제작되었다. 어찌 보면 이 자그마한 전불은 비록 흙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종교미술품으로서의 보편적 역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