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金正喜는 청대의 학술에 가장 밀착하여 적극적으로 수용한 문인으로, 19세기 조선의 학술과 문학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주로 김정희의 학문적 경향과 시학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김정희의 학문적 경향은 考據學의 성과를 수용하되, 이학의 전통적 지위를 수호하는 경향을 띠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옹방강, 완원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정희는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되, 전통적인 성리학의 지위를 수호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나타난다. 김정희는 조선의 금석학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역대 문헌을 정리한 『海東藝文考』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청나라 학술의 수용이 자국의 문화에 대한 연구로 전환된 것이다.
김정희는 두보의 칠언절구를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杜少陵七言絶句』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당시 두보를 최고로 존숭하던 청대 시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정희는 9명의 시인을 結血로 지목하고 가까운 시대의 시인에서 시작하여 윗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습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이 역시 청대 문인들의 성향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그는 동시에 문호와 경향을 가리지 말고 여러 사람들을 동시에 학습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轉益多師’를 특징으로 하는 두보의 학습 방법을 배운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