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월, 원폭 피해자 손귀달은 일본에 밀항해 체포되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후 20여년이 넘도록 병마에 시달렸던 그녀는 일본 원폭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좌경세력’의 접근을 우려한 한국 정부는 그녀의 활동을 통제하였다. 원폭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통받았던 그녀는 일본 병원에서 원폭 증세가 경미하다는 석연치 않은 판정을 받았고, 이를 핑계로 한국 정부는 그녀를 신속하게 강제송환했다. 송환 이후에도 그녀를 돕겠다는 일본인들이 있었으나 불법 입국자라는 전과로 인해 이런 기회조차도 박탈되었다. 당시 정부는 원폭 피해자 문제에 대해 근본적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고, 한일협정에서도 피해자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손귀달의 호소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한국 정부에 팽배한 반공주의에 의거해 일본 좌파들과의 접촉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당시 한국 외교의 현주소였다. 이후에 그녀의 오빠인 손진두도 밀항을 시도하였고, 재판을 통해 원폭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쟁취하였고, 이는 한국 피해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진두와 같은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여러 범죄 사건에 연루되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