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동아시아는 기(氣), 서양은 해부”라는 동서양 이분법의 틀에 이의를 제기하며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인체에 개입하기 위한 동아시아 의학에서의 노력 및 실행을 조명함으로써, 우주론적 개념 및 범주를 전제하지 않는 또 하나의 대등한 의학 실행 스타일을 동아시아 의학의 지형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물리적 대상으로서 인체에 대한 인식 및 실행 과정을 잘 보여주는 분야로는 해부는 물론 외과, 침구, 구급, 태산, 군진, 검시 등이 있다. 이들 분과 외에서도 인체 내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구조물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 행위자에 의해 경험되고 인식되고 해석되는 의학적 몸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이를 살핀 결과 물리적 실제 및 사유에 토대를 둔 동아시아인의 활동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이는 크게 의학적 실행, 인식론적 태도, 그리고 학술적 탐구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동아시아 의학에서 흔히 보이는 침구, 구급, 외과 등 치료를 수행하는 여러 과정 및 관련 처치법을 살펴보면 이는 공간이나 구조로서의 인체의 형태 그리고 물질의 변화 및 반응 등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의학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고대의 텍스트를 보건대, 몸은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과학적 대상물이며, 해부와 관찰 및 계측은 중요한 기술적 도구로서 이를 통해 내부 장기의 생김새, 계량치, 질적 특성 등 인체의 요점을 알 수 있다는 인식론적 태도도 포착된다. 셋째, 해부학적 구조 및 이를 토대로 한 몸의 움직임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인체의 생리적 현상 및 해부학적 구조물을 토대로 생리 기전을 추론하고 이를 임상 과정에서 검증하는 방식으로 몸에 대한 학술적 탐구를 수행했던 의학 활동 역시 관찰된다. 우주론적인 사유와 대비되는 이러한 의학적 실행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주목할 가치가 크다. 이때의 의학적 몸을 ‘공간지형학의 몸’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