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1728년 김천택에 의해 편찬된 현존 最古의 가집 『청구영언』을 자료적 측면에서 살피고 몇 가지 특징적 국면을 밝힘으로써 18세기 초중반 국문시가집의 존재 양상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점검하고자 했다. 김천택 편 『청구영언』은 필사본 원본 미공개 상태로,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에서 간행한 활판본이 『진본(珍本) 청구영언』으로 약칭되어 오랫동안 연구의 중심 자료가 되어 왔다. 한글박물관이 자료 원본을 구입해 2017년 영인편 및 주해편을 내놓음으로써 편찬자의 이름을 단 자료가 된 후 학계에서 관심과 반향이 커지고 있다.
김천택편 『청구영언』은 체재와 분류 방식이 잘 정비되어 있고 수록 작품과 작가 선택에 엄정성과 정확성을 기한 점에서, 최초 가집이라기엔 너무나 완비된 자료임이 그간 연구들에서 밝혀졌다. 또 전체 서발문 및 특정 작품 발문을 그대로 옮겨오거나, 연(작)시조의 경우 전편(全篇)을 수록한다든지, 말미에 상당한 비중의 사설시조를 싣는 등 가창을 위한 대본용 가집들과 분명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청구영언』은 편찬자이자 기획자인 김천택이 오랜 시간 동안 정성들여 매만진 자료이기에, 이와 영향 관계에 놓인 『해동가요』처럼 완성 전후에 유사 이본이 생산,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본 논의에서 김천택의 시가집 편찬 의도와 『청구영언』 편찬 정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주목한 특징적 국면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체재를 통해 본 작품 배열 방식, 수록된 서발문의 특징, ‘여항육인’ 항목의 설정 과정, 수록 작품의 일면을 통해 본 내용 특성 등등. 고찰의 결과,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엮으면서 당대 시조의 음악적 양상과 변화를 반영하고자 했고, 작가의 고증 및 원전 문헌에 대한 검증을 거쳤으며, 시조 음악과 당대 문화 내의 역할에 따라 항목 순서를 정하고, 노래의 해석과 향유 상황을 고려해 작가와 작품을 배치한 다음, 직접 작품 발문을 쓰거나 전체 서발문을 청해 붙임으로써, 사대부 문집에 근사한 완정한 시가집 생산으로 나아가고자 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물론, 작품에 대한 분석과 작가 검증, 유사 작품 간 대조를 통한 선택과 확정, 이에 따른 항목의 재배열 등 고심과 고민을 거듭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조정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천택 편 『청구영언』과의 연계 가능성을 세밀히 검토한 『청구영언』(박순호본)에 대한 논의를 비롯해, 18세기 초중반 가집의 존재 양상을 고찰한 최근 논의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천택 편 『청구영언』은 내적 완성도나 그것이 생산된 외적 조건을 감안할 때 그 초고본 내지 선행본이 존재했을 여지가 대단히 크며, 최종 편찬까지의 점진적 단계를 상정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자료적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김천택 편 『청구영언』은 편찬 의식면에서 19세기 가창용 대본 자료들과 거리가 먼, 시가집 혹은 ‘시조집’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자료이다. 따라서 『청구영언』(박순호본) 혹은 몇 개의 가집이 김천택 편 『청구영언』 이전 혹은 동시에 출현했다 하더라도 그 ‘최초’로서의 가치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초기 음악과 문학에 정통한 중인 가객 김천택이 당대 노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엄정한 의식, 일관된 체재의 시가집을 완성한 점은 분명 시가사적으로 최초 ‘사건’에 해당한다.
김천택 편 『청구영언』을 최초라기엔 너무나 완결된 시조집으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가집들과 선후를 바꾸기 어려웠던 것은, 가집의 출현과 향유를 우리 연구자들의 시각에서 단선적으로 계열화해 온 초창기 연구 관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탓인지 모른다. 이제 새로운 18세기 초중반 가집들이 발견되어 자료적 고찰을 통해 그 형성 과정을 객관적으로 그려보게 된 만큼, 자료들의 친연성과 영향 관계에 편견 없이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18세기부터 편찬자의 관심사에 따라 성격이 다른 시가집이 거듭 생산되기도 하고, 계승 혹은 변주에 의한 다양한 가집들이 동시적으로 편찬, 향유되기도 한 사실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