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35년부터 태평양전쟁 초반까지 『조광』 기사를 통해 조선 지식인의 전체주의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발호하는 상당 기간 동안에도, 조광은 전체주의의 개념과 이론에 대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전체주의로, 자본주의에서 통제경제로 세계가 질적 ‘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상태였다.
1939년 초 제74회 제국의회에서 히라누마 수상이 황도주의를 구미의 전체주의와 같이 이해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독일·이태리와 구별되는 황도정신을 일본 특유한 지도적 정치원리로 공식화했다. 전체주의와 황도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조광 필진들도 전체주의에 대한 이론적 모색을 시작했다. 전체주의가 가져올 폐해를 우려하면서도 전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 다소 모호한 입장이었다. 황도주의는 구체적 인간을 중시하므로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전체주의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일본은 견지하고 있었으나, 조광은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내각 성립 때까지도 ‘신체제’가 전체주의를 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혼선을 보였다. 이는 조광이 ‘동아협동체론’의 입장에 비교적 경도된 측면이 있었고 그 영향력 하에 아직 놓여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이 서구의 전체주의와 거리를 두고 독일 나치즘이나 이태리 파시즘과 다른 ‘일본적 전체주의’인 황도주의를 전면적으로 표방하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더 이상 진전하지 않았다. 이후 조광은 내선일체와 황도사상의 앙양을 부르짖는 글을 게재하며 일본주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