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유학자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정치사상의 요체인 ‘재상정치론’의 유교정치철학적 의미를 규명하고 그 연원을 밝히는 것이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담론을 수용한다면, 이러한 정도전의 정치적 구상이 세습 군주제에 기반한 조선의 왕권과 대립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통설인 ‘재상정치론’과 조선의 세습 군주제의 이율배반적 갈등 관계를 정도전은 과연 어떻게 봉합하고 정당화하는지, 그리고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가 본고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도전은 유교의 만들어진 과거, 즉 선양 신화와 요순의 관계에 착안하여 ‘재상정치론’을 구상한다. 상왕은 물러나 남면하여 현능한 신하에게 통치 대행이라는 시험에 들게 하고, 현능한 신하는 이러한 시험에 임하여 최선을 다해 조정과 신민을 보살피는 것, 이것이 정도전이 구상한 재상정치론의 원형이다. 물론 현실의 세습 군주제에서 군위는 혈연에게만 승계되므로 더이상 선양이 있을 수 없지만, 재상의 신위는 현능한 이에게 얼마든지 이양하여 통치자의 현능과 국가 근본의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과 현실 정치력의 상충은 유교 정치사의 유구한 딜레마였다. 정도전은 세습 군주제에서 덕성과 능력을 아울러 갖춘 이상적 군주는 선천적 차이로 인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현능한 신하가 군주의 부족한 덕성을 바로잡고, 정치 일선에서 통치를 대행하는 정치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통치 권력의 자격과 이념적 정당성 그리고 정치적 효율성과 안정성을 함께 확보하는 것이 정도전 ‘재상정치론’의 유교정치철학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