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목적은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의 달빛 0장」의 문제작으로서의 성격에 주목하여 문학사적 계보에 재배치하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김승옥의 소설가적 주체로서의 정치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정치성이란 ‘어떤 소설가이고 싶은가’라는 정체화의 문제에 대한 욕망과 응답이 작품을 통해 반복되고 변주되는 방식에 따라 드러나며, 김승옥이 소설가로서 시대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쓴 「서울의 달빛 0장」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성의 객체화 전략을 통해 남성 주체의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김승옥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친 창작 매커니즘이기에, 본고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1960년대의 대표작 「무진기행」에서 드러나는 객체화의 전략은 1970년대의 「서울의 달빛 0장」에서도 반복된다. 김승옥 소설에서 여성은 최저이면서도 최후의 객체로 전제되며, 남성 주체의 ‘자기 세계’를 지탱하는 기반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기존의 여성 객체화 전략이 실패함으로써 변주가 일어난다. 필수구성성분인 전제된 여성이 이탈함으로써 남성 주체의 ‘자기 세계’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는 객체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시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객체를 외부로 밀어냄으로써 주체를 보호하는 혐오 감정이나, 객체의 가치관과 충돌하여 주체적 정체성을 정립하는 갈등의 장치는 모두 ‘자기 세계’의 구성원리로 인해 봉쇄된다. 모든 수단을 잃은 주체에게 허락된 정치적인 언어는 침묵뿐이며, 이렇듯 주체가 필연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서울의 달빛 0장」은 침묵 자체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 분석에 따라 본고는 1970년대에 들어 소설 창작을 거의 하지 않았던 김승옥의 침묵이 의도된 것임을 증명하고, 소설가적 주체로서 김승옥의 정치성을 ‘침묵의 정치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김승옥의 단절됐던 김승옥의 문학을 다시 잇는 작품이자 최후의 정체화로서, 「서울의 달빛 0장」을 계보의 마지막에 위치시킬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