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의 활동은 한국 근현대 우익 여성운동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는 이 화학당을 졸업한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 을 뿐 아니라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동아일보 여기자로 여성의 생활개선과 여성계몽을 강조하는 글쓰기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 회장으로 활동하며, 단체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적 극적이었다.
박승호에게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확장은 여성단체가 국가건설 과정에 참여 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박승 호에게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확장하는 것은 여성 계몽운동의 과정이기도 하였 다. 계몽운동의 내용은 문맹퇴치인 실력양성이 주였다.
그리고 박승호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의 정치 진출을 중요시하였 다. 미군정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활약하였던 박승호는 박현 숙, 신의경, 황신덕 3명의 의원들과 함께 여성의 정치참여를 공식화하기 위해 여성할당제라 할 수 있는 ‘여성의원특별취급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안은 제 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1948년 5·10 총선거에 박승호는 용산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5·10 총선거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당선되 지 못하였다. 박승호를 비롯한 여성지식인들은 여성 대표로서의 위상을 획득하 는 것에 실패한 것이었다. 실패의 요인 중 여성운동의 방향과 관련하여 생각할 볼 것은 ‘여성 대표’들이 여성 유권자들이 실제로 원했던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만의 자각을 중시하고, 여성의 실력양성을 중심에 둔 여성 계몽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이기도 하였 음을 박승호의 활동과 인식에서 엿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