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0월 27일, 臺灣 臺中州 能高郡 霧社(현 南投縣 仁愛鄉)에 위치한 무사소학교에서는 기념운동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날 오전 8시경 무사 일대 11개 원주민 부락 가운데 거사에 호응한 6개 부락의 원주민들이 행사장을 기습 일백여 명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총독부는 수천 명의 軍警을 동원하여 거사에 가담한 원주민 부락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대만에서 벌어진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최후에 발생하였지만, 가장 참열하고 비장한 이 사건을 ‘霧社事件’이라 한다.
사건을 일으킨 싸이더커족(賽德克族, Seediq)은 대만 중앙산맥 중부에 주로 거주한 泰雅族 원주민의 한 계통이다. 山地 原住民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유명한 이들은 왜 무사사건을 일으켰을까? 이들이 호전적이고 용맹하였다는 것만으로는 사건 발생의 원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화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무사사건은 遠因과 近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비극적 결말이었다. 遠因은 대만 접수 이래 총독부가 진행한 원주민정책, 곧 이번정책에 있다. 근인은 무사 일대 원주민들에게 가해진 압박과 차별, 이로 인한 원주민의 반발과 투쟁이었다.
대만총독부는 무사 원주민의 반항을 ‘돌발사건’이라 하였다. 이는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여러 기록과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무사사건은 원주민들이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항거’였다. 대만에서 발생한 원주민 무장항거의 대표적인 사례인 무사사건은 일본 식민지배의 약탈성과 문화동화운동이 초래한 모순이 격화되어 나타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