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서북학회월보』 20호에 실린 중국 장타이옌[章太炎]의 「구분진화론(俱分進化論)」을 소개하고, 대한제국기 중국 지식 수용의 특성과 그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구분진화론」은 중국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에 실렸다.
『민보』는 쑨원이 주도한 중국 동맹회의 기관지로 당시 량치차오⋅캉유웨이에 대항하는 혁명파의 핵심기지였다. 「구분진화론」은 장타이옌이 출옥한 후 처음으로발표한 논설이다. 글은 불교 유식론의 수용과 그의 사상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09년 9월 서북학회는 ‘3파통합’ 무산의 파장으로 필진 교체 및 지면의 ‘쇄신’을 단행한다. ‘쇄신’ 결과 기존의 실업(實業)에 치중되었던 정보들이 각종분과학문적 지식을 포괄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서북학회월보』는 「구분진화론」을 소개하면서 분량의 약 50%에 달하는 분량을 삭제하는 과감한 편집을 단행한다. 그 결과 『민보』판 「구분진화론」과 『서북학회월보』판은 전혀 다른 의미로변화하게 된다. 『민보』판은 불교 유식론을 핵심 원리로 삼고 있으며 허무주의적 색채를 지녔다. 장타이옌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헤겔과 스펜서 등 당대 사회진화론의 핵심논자들을 직접 겨냥하고 있었다. 『서북학회월보』판은 헤겔과 스펜서가 등장하는 서론 및 불교적 원리 해석 부분들을 대폭 삭제하며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게 된다. 『서북학회월보』판 「구분진화론」은 원전의 불교적 색채와 허무주의를 지워내고, 지식인의 각성 촉구, 그리고 과거의 ‘영웅’들을 환기하며 일종의 국가의 ‘기’를 되살릴 것을 암시하는 텍스트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재구성은 일진회에 의한 병합론 제창,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라는 정치적 급변 속에서, 그리고 학회지로의 ‘쇄신’을 내세운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국가를 위해 발언하고자 한 서북학회의 노력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