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의 필리핀 체류 경험을 담은 유고시집은 아시아 여성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통찰과 그 대안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으며, 성적 지배 관계를 합리화하는 초월적 이원론을 해체함으로써 여성해방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함축하고 있다. 이 논의는 전통 기독교 담론에 도전한 급진적인 여성신학의 한 담론인 생태여성신학의 관점에서 고정희의 ‘래디칼’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는 해방된 모성의 내적 논리를 규명했다.
고정희는 유고시집의 ‘밥과 자본주의’ 연작을 통해 억압받는 아시아 여성의 현실을 형상화하면서 성적, 계급적, 국가적 지배 관계에서 야기되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평등이 절대적이고 신성한 혁명의 이상임을 역설했다. 또한 ‘외경읽기’ 연작에서는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세속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죽음의 문화를 회복시키는 주체이자 생명의 창조자인 ‘어머니 하느님’이 구현하는 사랑과 살림의 세계를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고정희의 유고시집이 ‘해방된 모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살림과 사랑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고시집은 해방적 언어의 전략으로서 ‘외경’ 혹은 ‘여백’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구체적인 대안과 비전을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고정희의 유고시집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해방된 모성’의 주체로서 ‘어머니 하느님’이 존재하는 ‘외경’ 혹은 ‘여백’의 세계가 초월적 이원론의 해체 이후 도래할 평등하고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너그럽고 평화로운 해방의 장소이며, 그것을 노래하는 해방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로 정체화되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