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무는 1106년(예종 1)과 1108년에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남도의 전체 군현 409곳 가운데 주현이 50, 속현이 291, 감무현이 68곳으로 나타났으며, 전체 군현에서 속현 비율은 71.15%였다. 속현은 이전에 비해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많은 수가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개편은 주현속현제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여진정벌이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보았다. 당시 유망이나 기민이 자주 일어난 곳은 경기를 포함해서 서남도(남경광주도・충청주도)・서해도 등으로, 대부분 감무가 많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또한 도원도에서도 감무가 집중적으로 설치되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군수물자의 보급 및 운송에 상당한 역의 부담이 발생했기 때문에 유망이나 기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106년에는 경기 인근에 감무를 두면서 유민안집을 하였고, 1108년에는 경기 등에 집중된 역의 부담을 완화하고자 충청도 등지까지 감무를 설치해서 그 부담을 분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쟁이 일단락 된 이후에도 감무관은 그대로 존속하여 군현 수령의 일반적인 기능들을 두루 수행하게 되는데, 이에 인종대와 명종대에도 여건이 될 때마다 현령과 감무를 증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