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김태준의 ‘사학연구’의 배경지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역사서술의 독특성에 주목했다. 경성제국대학 재학기 김태준과 사학전공의 교섭관계는 희미하다. 성대(城大)그룹이나 경제연구회와의 간접적인 관련성은 추론할 수 있으나, 직접적인 관계는 찾기 어렵다. 그는 1935년경 서구의 ‘한국학(Korean Studies)’ 연구경향에 관심을 갖게 된다. 서구의 ‘한국학’은 당시 민족지학(民族誌學)의 일부로 비교언어학, 지리학, 인종학 등이 중심이 된 19세기적 성과들이었다. 김태준은 민족지학이 보여주는 결정론적 시각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뒷받침이 되는 것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그들을 비판한다. 서구의 ‘한국학’에 대한 독서와 비판은 그를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로 이끌게 된다. 김태준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역사학의 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일본인 학자들의 방법론과 시각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활용하는 종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역사연구와 더불어 역사서술의 기도도 있었다. 그는 「조선민란사화」를 서술하며 자신의 기존 학설들의 문제점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모순점들을 발견해나가게 된다. 양반의 토지소유에 대한 입장변화, 식민지 조선의 민족주의를 선양하는 세력이 양반인지, 혹은 신흥 제3계급인지 등에 대한 이론적 논제들이 파생된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술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중단되었다. 더 나아가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실천활동으로 나아가게 됨에 따라 그의 역사연구가 가졌던 가능성들은 충분히 개화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