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근·현대 시기에 화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성리학적 사유를 살펴본다. 구체적으로 외필논쟁(猥筆論爭)에서 정의림이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변외필변」으로 정리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외필논쟁에서 정의림의 기여와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한다.
이 글은 외필논쟁의 경과와 정의림이 이 논쟁에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1901년 이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재구성한다. 특히 정의림의 외필논쟁에 대한 입장은 정재규와의 동질성과 차이를 중심으로 규명한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의 논점으로 집약된다. 정의림은 외필논쟁에서 영남의 정재규와 보조를 맞춰 「외필」의 성리학적 방향성을 비판하는 담론에 대응한 호남의 대표적인 노사문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주리’라는 관점에서 이이와 기정진의 성리학적 연속성을 가정하고, 이를 기초로 비판자들에 맞선 저술을 남겼다. 그럼에도 기정진의 리 개념을 대표하는 ‘사지연’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기정진 성리학에 고유한 소이연과 사지연사이에 내재한 개념적 균열의 가능성이 정재규와 정의림 사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정재규는 사지연에 보다 우호적이었지만, 정의림은 소이연에 기울고 있다.
이상의 논의는 화순 지역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난 정의림의 학술사적 위상을 보다 섬세하게 고찰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렇게 볼 때 외필논쟁의 한계를 넘어 정의림과 그가 대표하는 학술 집단에 대한 추가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것은 20세기 화순유학, 나아가 20세기 호남유학의 성격과 내용을 규명하는 데 일정한 보탬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