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근대적 풍수 연구의 효시가 되는 시마다 초레이(島田重禮, 1838-1898)의 「풍수설」에 대해 고찰한다. 시마다는 도쿄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한학자로서 전통적인 ‘한학’이 근대적 ‘중국철학’으로 전환되는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글은 시마다의 풍수설의 배경이 된 19세기말 중국에서 풍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 즉 반기독교 운동인 교안(敎案)이나 철도 부설 및 광산 개발의 중단 사태 등을 조명한다.
시마다는 전통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풍수와 관련된 매장문화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풍수 문화를 대조적으로 인식했다. 중국에서는 분묘를 중심으로 하는 음택풍수가 주류를 이룬 반면, 일본에서는 ‘가상(家相)’이라 불리는 주거지의 길흉판단을 중심으로 하는 양택풍수가 발달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의 풍수문화의 차이는 시마다로 하여금 중국의 풍수문화를 ‘이문화’로서 다룰 수 있는 시선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시마다의 「풍수설」은 일본 중국고전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문화 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풍수설」 전체를 관통하며 논의를 이끌어 가는 중심 질문은 “묘지의 길흉을 논하거나 그 길흉이 자손의 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학설이나 사상적 관념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마다는 풍수의 개념과 기원, 유파, 학설의 연혁, 사상적 의미와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풍수에 대해 논하고 있다. 본고는 시마다 초레이의 「풍수설」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근대화 초기 일본에서 ‘풍수’가 어떻게 인식되고 담론화되었는가를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