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 후기까지 북한산에 창건된 사찰을 중심으로 변화상과 성격을 연구하였다. 조선 후기 이전 대상 사찰은 장의사·승가사[승가굴]·진관사·향림사·적석사·신혈사·삼천사·청량사·문수사 등이다. 그중에 장의사는 북한산에 처음으로 창건된 사찰로서 국왕이 죽은 신하의 명복을 위해서 지은 유일한 사찰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장의사는 고려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까지 왕실의 비호를 받는 호국사찰로 기능하였다.
대부분의 북한산 사찰은 고려시대 이후에 지어졌다. 이는 대개 현종과 관련한 사찰이다. 현종 대는 불교 영향력이 증대되어 호국불교가 본격화하였는데, 대표적인 사찰로는 장의사·승가사·신혈사·향림사 등이었다. 현종 이후 아들 정종·문종과 그 직계인 선종·숙종·예종·인종·의종까지 5대에 걸쳐 왕들이 남경에 행차할 때는 승가사·장의사·신혈사·문주굴 등을 찾아 제를 올리거나 시주하였다. 특히 신혈사·승가사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 예종 대에는 교종 중심의 사찰에서 선종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무신정변 이후 왕의 남경 행차는 중단되었고 북한산 사찰을 찾지 않았다. 고려 말 보우가 중흥사를 중창하여 북한산 사찰의 명맥을 이었을 뿐이다.
조선 전기에 『세종실록 地理志』와 『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장의사·향림사·적석사·청량사·중흥사·승가사·삼천사·문수사·진관사·도성사 등 10개 사를 중심으로 살폈다. 이들 사찰 중에 장의사·승가사·진관사[신혈사] 등은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비보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후원받아 운영되었다. 하지만, 성종 이후 사람이 등용되면서 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사찰은 폐사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간된 사찰은 대개 북한산성 수축과 관련한 僧營寺刹이었다. 이는 『北漢誌』에 기록된 문수사·중흥사·용암사·보국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상운사·태고사·진국사·봉성사·원효사 등 12개 사찰이다. 하지만 이들 사찰들은 僧役제도의 변화에 따라 폐사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사찰들도 승군 제도가 완전히 없어진 갑오개혁 이후에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도 남아있던 사찰들은 1915년, 1925년 대홍수에 소실되었다. 상운사·태고사·부왕사 등은 광복 후에도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