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3년(1747) 북한산성의 총융청 이속은 수도권 방어체계를 재편하는 신호탄과도 같은 조치였다. 이로써 총융청-수어청을 거점으로 하는 경기방어체계가 확립됐으며, 북한산성은 총융청의 외영으로서 정조 17년(1793) 수원이 장용영에 이속되기 전까지 남양·수원·북한·파주·장단의 5영의 중심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재정면에서도 身米와 軍需保米가 주를 이루던 총융청의 수입구조가 북한산성의 군향곡과 30곳의 둔전, 양서지방에서 옮겨오는 小米 등으로 증대됐다. 또한 북한산성과 탕춘대 내에 거주할 모민책을 통해 산성 인근 둔전이 개발되고 군기와 종이, 메주를 만드는 계인과 역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정조 17년(1793) 총융청 좌영이었던 수원이 장용영 외영으로 편입되면서, 총융청의 장초, 아병과 군수보가 줄어들고, 양서첨향미의 일부도 장용영에 이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총융청의 군사적 위상은 영조대 후반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장용영이 해체된 순조 초반까지도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경기 서북지역과 도성을 연결하는 방어체제에서 총융청 산하 북한산성의 역할과 위상은 여전히 지속되었기에, 중앙정부는 총융청의 信地라 할 수 있는 북한산성의 군향과 군기 관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갔다. 이에 북한산성의 군향은 영조대 중반 2만 9천여 석에서 순조 7년(1807) 무렵에는 쌀로만 5만 1천여 석으로 증가했으며, 산성내 2만 5천여 석 정도가 상시 비축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19세기 중반 총융청이 총위영으로 재편되고, 고종 21년(1884) 폐지되는 시점까지 이처럼 안정적인 재정구조가 어떠한 변화상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