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역에 대한 일본 연구자의 고고학 조사는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40년대 일본 패전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많은 수의 유적 발굴 등,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공통되는 모습이었다.
식민지 지배의 기초 조사로서 고고학 조사가 실시된 대만이나, 일본의 선사·고대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서의 식민지 조선의 고고학 조사 등은 서로 목적은 달랐으나 일본 연구자의 단독 조사가 가능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과는 달리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으며, 일본 연구자들의 조사 외에도 유럽인들에 의한 조사와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등의 중국 독자적인 학술기관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동아시아 고고학의 패권을 잡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동아고고학회’를 조직해 북경대학과의 공동 조사 등을 시도하였지만, 중국 고고학계의 내부적인 문제, 반일 감정등으로 중원 지역에서의 조사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결국 일본의 점령지였던 만주와 요동 지역의 조사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조사는 오로지 일본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중국 고고학은 유럽 고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고고학으로부터의 영향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고고학 내에서 중국 지역의 조사 성과는 매우 중요했으며, ‘동아고고학’은 일본 고고학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었다.
이렇듯 일본 제국주의 시기 일본인에 의한 동아시아 지역의 조사 성과가 해당 지역의 학문적 발전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의 중국 동북지역 조사 성과가 중국 고고학의 학문적 성립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지만 일본 고고학 발전의 기초가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