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정산 전투’로 알려진 1차 홍주의병 정인희 부대 대 관군의 진압 작전을 면밀히 비교 분석한 연구다. 기존 학계에서 선봉장 정인희 그리고 관군 측 상황을 다룬 적이 없었고, 이에 문헌 고증과 필드워크를 시행했다.
1896년 1월 18일 청양군수 정인희는 선봉장이 되어 2천 명 규모의 부대를 편성한 뒤 41km 거리의 공주부 공격을 감행했다. 휘하에 참모장 이세영 등 유림들이 보좌했고, 금정역참 역민들이 부대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인원에 비해 무기 부족, 험준한 지형, 악천후가 겹쳤던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그들은 18.6km 행군한 뒤 정산에서 3일간 지체했다. 그 사이 공주부 관군 100명 중 구완희 소대 5 0 명은 정산과 공주의 경계에 있는 공수원에 매복했고, 백낙완 소대 50명은 후방을 사수했다. 1월 21일 저녁 출정을 재개한 부대 선발대는 공수원에 이르러 관군의 ‘양동 작전’에 기습당했고, 후발대가 도주하면서 결국 패했다. 소규모 관군이 화력뿐만 아니라 전술 면에서 우위에 있었던 점이 부대의 정산 전투 패전 요인으로 주목되었다. 학계에서 정산 전투 접전 지역이 철마정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정산군 공수원(지금의 청양군 목면 송암리)임을 확정하였다.
정인희는 패전과 동시에 군수에서 파직된 뒤 끝내 충남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정인희 휘하 이세영 등은 홍주의병 참전 실패 경험을 통해 1906년 2차 홍주의병 봉기를 다시 일으켰다.
한말 전기 의병 대 관군의 전술 비교 분석 사례가 군사와 역사학계, 지역 사 연구에 도움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