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광해군조 남명학파가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던 시기에 중북(中北)으로 활동하다가 유배되었던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1551-1628)의 유배기 한시 13제(題) 15수(首)를 상세히 고찰하였다. 설학은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1504-1559)·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문인으로, 남명학의 요체인 경의(敬義)로 대변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죽임을 당하여 폐정(弊政)이 본격화되는 기미가 발동하자 관직에서 물러났고,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역양(嶧陽) 문경호(文景虎, 1556-1619) 등과 함께 대북(大北)에서 이탈하여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다가 70세인 1620년 2월 황해도 백령도(白翎島)에 유배되었다.
설학의 시는 『설학집(雪壑集)』에 자작시 27제 31수가 전한다. 이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3제 15수가 유배기에 지어졌고, 그밖에 만시(挽詩) 10제 12수와 기타 4제 4수가 더 있을 뿐이다. 설학은 유배지에서 4제 5수를 짓고 시와 함께 「백령도지(白翎島誌)」·「허와기(虛窩記)」·「무회옹자서(無懷翁自序)」·「신해생갑회지도(辛亥生甲會之圖)」 등을 남겼으며,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어 가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해배(解配)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객로에서 9제 10수를 짓고 일기 「남행록(南行錄)」을 남겼다. 이 때문에 유배기에 지어진 시는 창작된 연월과 날짜·장소까지도 명확히 파악이 가능하고, 또한 유기적으로 생생한 복원과 분석이 가능하다.
유배지에서 지은 시에는 곤액(困厄)에 처했지만 근심걱정하거나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존망·안위를 이치로 미루어 헤아림으로서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달가워하며 지냈던 도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객로에서 지은 시에는 이배되면서 지나쳐온 장소, 꿈속에서의 정경, 곤궁하고 핍박당했던 상황, 날씨, 풍경, 해배되어 귀향할 때의 정서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설학은 경의로 서로 전해온 남명학의 정통을 계승한 신비로서, 그의 유배기 한시에는 평생 심신을 수양하고 의롭게 처신했던 남명학파 선비의 정신과 사상이 완연하게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