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학계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馬峴堤設創記」는 17세기 경북 영천에서 살았던 선비 金孝達(1610-1690)이 1667년, 7년에 걸쳐 어마어마한 私費를 들여 마현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그 顚末을 기록한 고문서이다. 이 고문서에는 김효달이 마현제를 축조하게 된 동기와 경위, 어떤 시련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의 꿋꿋한 기상 등이 감동적으로 드러나 있다. 게다가 저수지 축조 일정, 소요경비, 저수지 관리를 위한 규정 등 저수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들이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한 정점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마현제설창기」에 수록된 저수지 관리 규정을 살펴보면, 막대한 돈을 들여 저수지를 막고도 집안에 들어오는 이렇다 할 이익이 없다. 일정한 보수도 없이 저수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인 都監은 대대로 嫡長子에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근엄하고 후덕한 후손들 가운데서 선정하도록 되어 있다. 일정한 보수를 받고 각종 사무를 실질적으로 맡아서 처리하는 저수지의 실세인 監庫는 아예 혈연과는 관계없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경작자 가운데서 선정하게 되어 있다. 혈연의 밀도보다 덕목을 앞세워 도감을 선정하고, 혈연과는 무관하게 덕목으로 감고를 선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효달의 적장자들과 저수지 사이를 연결하는 혈연의 끈은 대단히 느슨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효달의 후손들이 저수지로부터 누리는 혜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수지를 수리할 때 부역하는 인부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수지 운영을 위해 경작자들에게 부과하는 水稅도 내지 않았던 것 같다. 요컨대 혜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한 사재를 투자하여 축조한 저수지로부터 들어오는 실질적인 수입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볼 때, 김효달은 집안의 사유물로 저수지를 막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저수지를 막았음이 거의 분명하다. 이점은 「마현제설창기」의 첫머리 부분의 전체적인 문맥 속에도 곡진하게 암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친필인 「漆田堤記畧」에도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김효달은 가진 자의 사회적 환원,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현한 조선조의 대표적 선비로 자리매김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