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남원은 내륙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예로부터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고대 관방시설로서 주목을 받아 왔고, 조선후기에는 교룡산성이 여러차례 수축되었다. 본고는 교룡산성의 수축과 운영 등에 관하여 군사사적 측면에서 군사편제와 규모, 그리고 실제적 측면들을 고찰하고자한 글이다. 조선전기에 퇴락하였던 남원의 교룡산성은 선조 27년(1594) 처영에 의해 수축되었다. 그 후 국방위기에 따라 숙종대에 산성은 2차례 대대적으로 수축되었고, 수성장은 지방 수령이 겸하여 지역 수호의 거점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군기와 집물은 차례로 갖춰졌다.
18세기 교룡산성의 군사편제를 보면 수성장겸부사(守成將兼本府使), 별장(別將) 1명, 승장(僧將) 1명, 대장(代將) 1명, 수첩군관(守堞軍官) 500명, 군병 1천여명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18세기 전기 교룡산성의 군병은 1천여명 정도였으나 그 성격은 속오군이었다. 이는 전라도 군현 중 남원 본현과 속현인 인근의 곡성, 구례에서 충원된 보인(保人)이었다. 교룡산성의 속오군은 실제 군역에 종사하는 군인이 아닌 납포군이었다. 산성 유지를 위한 재정원이었던 것이다.
산성 운영의 실제에서는 첫째, 산성 수축의 과정에서 관찰사와 수령의 갈등이 문서 행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둘째, 산성의 경영에 있어 남원현 수령과 별장의 관계, 군기와 집물 보수의 절차와 그 사례, 그리고 산성 수호의 실제, 즉 입번(入番)의 문제 등을 차례로 검토하였다.
본 연구는 지방 산성인 교룡산성의 운영 실제를 고찰함으로서 여타 지방 산성 운영의 이해를 돕는 사례연구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