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현(1524~1580)은 명종부터 선조 때에 활동한 관료 문신으로, 자는 군옥(君沃), 호는 관원(灌園), 또는 근사재(近思齋)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조판서 박충원(朴忠元)의 아들이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조부이다. 본고는 1927년 후손이 연활자본으로 간행한 『관원집』을 저본으로 하였다. 그의 시와 그와 교유한 인물들의 문집에 남아 있는 시들을 근거로 그들과의 교유 양상을 살피고 박계현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박계현은 28세에 벼슬에 나아간 뒤부터 57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30년 동안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는데 윤원형 일파와 대립하여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등 변방의 번진으로 부임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중앙에서는 신광한, 이윤경, 조사수, 홍섬, 노수신, 심수경, 유희춘 등, 관북에서는 백광홍, 조연, 정사룡, 정유길 등, 영남에서는 이황, 이정, 조식 등, 호남에서는 임제, 송인, 기대승 등과 교유하였다. 그가 관료 생활 동안 교유했던 인물들은 기묘명현이나 조광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그의 시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변방으로 외유가 잦았던 만큼 위국 충정을 드러내었다. 그는 벼슬하면서 범중엄(范仲淹)을 전형으로 삼아 그의 정신을 부절(符節)로 여겼다. 둘째, 내외직을 오가면서 당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탈속적 정신세계를 지향하였고,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고아한 뜻을 품었다. 셋째, 이언적의 문묘 배향과 권벌의 신원을 주장하고, 남계서원의 사액을 주청하는 등 사림의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하였다. 본고에서 살펴본 그의 관료 생활과 교유 양상을 통해, 당쟁이 싹트기 시작한 정치적 변혁기에 사화를 입은 사림의 정절을 기리고 그 정신을 지켜내었던 그의 삶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