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사 본페이는 1868년 빈고국 미타니군(현재 히로시마현)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3년 일본우선회사를 퇴사한 그는 장래를 위한 도전으로 조선에 건너왔다. 그리고 1905년 경상남도 밀양군 상남면에서 일본인 이주민을 모아 대규모 이주농촌을 건설하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 ‘유아사촌’이라 불리었다.
유아사촌은 회사나 조합이 아닌 개인별 이주로 ‘성공적’ 일본인촌을 건설한 대표적 사례이다. 또 이주민의 정착과 농업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측근과 함께 밀양은행도 설립·경영하였다. 이러한 이민·농업·금융 분야에의 도전과 성공에 힘입어, 그는 1912년 고향에서 중의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28년까지 내리 5선을 하며 식민지 지역사회와 본국, 그리고 조선총독부 간을 연결한 ‘조선 관계 대의사’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유아사는 제국의회 중의원 예산·결산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총리와 조선총독 등을 상대로 조선 통치 전반에 대해 질문하고 비판하였으며, 조선 관련 법안 심사에도 많이 관여하였다. 또 조선에서의 자치제 실시와 산업개발이 내선융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임을 역설하여 ‘제국의 브로커’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여론을 무시한 밀양군청 이전 계획에 제동을 거는 등 ‘제국의 로비스트’의 역할에도 충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