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표제지]=2,1,1
[판권지]=3,2,1
○ 발간사=4,3,5
○ 일러두기=9,8,2
구술지역과대상자=11,10,1
[차례 등]=12,11,5
노래허민 어딜 가도 일등 먹언 왓저/삼도동 이순손=17,16,28
90 넘도록 사는 집 우리베�� 엇어/조천리 김균숙=45,44,30
피농사 짖고, 청새 빱으며 살아/송당리 허순화(이미지 참조)=75,74,32
바당에서 한 평생/우도 오봉리 양석봉=107,106,28
메역자물고 우미 메고/성산 고성리 정양길(이미지 참조)=135,134,34
이날도 한금 저날도 한금/성읍리 고두옥(이미지 참조)=169,168,26
4ㆍ3으로 시부모ㆍ남폄 다 잃어/의귀리 정신숙=195,194,30
솔동산에 묻힌 인생/서귀포 송산동 고산석=225,224,30
자식덜 손지덜 키워난 생각베�� 안나/중문동 김화월(이미지 참조)=255,254,26
채 먹던 시절'잡곡장시'로 밥먹어/서광리 고희출=281,280,30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너무 서러워/가파리 송정순=311,310,32
제삿밥 열아홉 그릇 거립니께/인성리 김옥화=343,342,30
내 팔자 어딘가민 어떵허리/조수리 송태하(이미지 참조)=373,372,26
물질이 천직/한림리 문영자=399,398,28
깅인 칠월 나민 등 고린다/봉성리 강자숙=427,426,36
정든 마을 마음의 고향/노형동 현춘화=463,462,31
○ 편집후기=494,493,2
○ 편집위원=496,495,1
발간사=6,5,1
제주여성의 생애 살암시난 살앗주=15,14,1
노래허민 어딜 가도 일등 먹언 왓저/삼도동 이순손=17,16,1
신지내의 여름『제주100년』에서 발췌(남기섭 사진)=20,19,1
1960년대 관덕로(『제주100년』에서 발췌)=22,21,1
어릴 때 맺은 결의형제모임이다 뒤에 오른쪽 두번째가 이순손이다=25,24,1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미국립문서기록 관리청 소장)=27,26,1
지인 회갑연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33,32,1
90 넘도록 사는 집 우리 베�� 엇어/조천리 김균숙=45,44,1
일본에서남편ㆍ두 아들과 함께=55,54,1
1960년대 찍은 가족 사진=63,62,1
'조선성신회' 일동 사진(19581220)=65,64,1
피농사 짓고, 청새 뽑으며 살아/송당리 허순화(이미지 참조)=75,74,1
허순화의 남편 환갑 때 가족들과 함꼐, 가운데 앉은 이가 허순화 김화민 부부=78,77,1
구좌읍 송당리 본향당 굿에서 1982년 정월 열사흗날 박인주심방이 굿을 하고 있다 현용준의 민속사진집『영』에서 발췌=81,80,1
허순화 김화민 부부가 환갑 때 제주민속촌을 찾아 전통혼례복을 입고 옛기억을 떠올리며 사진촬영을 했다=87,86,1
허순화는 밭에서 그늘대를 만들어 아이들을 키웠다고 한다 사진은 민농 홍정표 사진집『제주 사람들의 삶』중에서 발췌한 그늘대사진=92,91,1
송당리 사람들은 피농사를 지을 때 새콜방아를 져서 밥을 지어 먹었다 사진집『제주100년』중에서(국립중앙박물관 소장)=96,95,1
바당에서 한 평생/우도 오봉리 양석봉=107,106,1
구술자 양석봉(왼쪽)과 큰언니가 우뭇가사리를 말리고 있다=111,110,1
육지 물질하러 가서 살 때 제주해녀들끼리 사진속의 남자는 뱃사공이다 구술자는 첫째줄 왼쪽 첫 번째이며, 그 앞에 세살난 큰딸이 서 있다=112,111,1
우도 포구의 옛모습(현용준 민속사진집『영』에서)=122,121,1
색동회에서 장한 어머니상 표창패를 수여하다=127,126,1
해녀의 필수품인 테왁 지금은 두렁박 대신 스티로폼을 사용한다=128,127,1
메역 자물고 우미 메고/성산 고성리 정양길(이미지 참조)=135,134,1
정양길이 일본에서 온 조카들과 함께 평생 살아온 초가집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였다 앞줄 오른쪽 아기 안은 이가 큰딸 신순안이고, 뒷줄 가운데가 큰사위 김정길이다=139,138,1
성산읍 고성리 사람들은 밭일을 하면서도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면서 생활했다 만농 홍정표 사진집『제주사람들의 삶』중에서=143,142,1
정양길은 20대 중반부터 7년동안 중국 출가 물질을 갔다 사진은 중국에서 친구들과 나들이 할때 모습 오른쪽에서 4번째가 정양길=152,151,1
정양길은 소를 키우기 위해 꼴을 베어 소짐과 등짐을 져 집으로 운반해 겨울을 났다 사진은『제주100년』중에서(만농 홍정표 사진)=158,157,1
정양길이 오랜만에 찾아온 외손녀 김금선과 어렸을 때 돌봐준 외증손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161,160,1
이날도 한금 저날도 한금/성읍리 고두옥(이미지 참조)=169,168,1
성읍리 그늘광(현용준 민속사진집『영』에서 발췌)=179,178,1
고두옥이 무장대 습격에 총상 부위를 설명하고 있다(『몸에 새긴 역사의 기억』에서 발췌)=183,182,1
남편ㆍ큰아들과 함께=188,187,1
집줄 놓기(현용준 민속사진집『영』에서 발췌)=192,191,1
으뜸실버부부상패=194,193,1
4ㆍ3으로 시부모ㆍ남편 다 잃어/의귀리 정신숙=195,194,1
최근의 모습=199,198,1
제주도의 전통 결혼 행차 모습(사진집『제주100년』에서 발췌)=201,200,1
말을 이용해 밭 밟는 모습=204,203,1
생전의 남편모습=211,210,1
1982년 찍은 가족사진=216,215,1
솔동산에 묻힌 인생/서귀포 송산동 고산석=225,224,1
솔동산 중심의 옛 시가지 풍경(현용준 민속사진집『영』에서)=228,227,1
일본 유학 때, 여고 시절 벚나무 아래서=231,230,1
시아버지 환갑 때 가족사진, 세 번째 줄 왼쪽 첫번째 여성이 구술자이다=237,236,1
솔동산의 현재 모습 주택가 모습은 없어지고 동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253,252,1
자식덜 손지덜 키워난 생각 베�� 안나/중문동 김화월(이미지 참조)=255,254,1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편 사진=261,260,1
삼면유족회 위령제 모습=266,265,1
친목회에서 제주일주 갔을 때=270,269,1
일본에서 사온 가위를 고히 간직하고 있다=273,272,1
혼자 살기 힘들어 딸네 집으로 옮겨 살고 있다=278,277,1
채 먹던 시절 '잡곡 장시'로 밥먹어/서광리 고희출=281,280,1
서광리 사람들은 4ㆍ3소개령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와 성담을 쌓아 포대를 지키면서 생활했다 사진은 안덕면 서광리에 남있는 4ㆍ3성담이다=286,285,1
고희출은 4ㆍ3소개령 이후 고향에서 친구들과 함께 대한청년단 일원으로 훈련을 했다 결의동생들과 함께한 고희출(오른쪽에서 두번째) 고희출 제공=288,287,1
고희출 남편 이윤평의 칠순 잔치때 가족들과 함께=293,292,1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보리를 갈때 돼지거름에 보리씨를 섞어 소로 밟은 후 밭에 뿌려 농사를 지었다 사진집『제주100년』중에서(만농 홍정표 사진)=297,296,1
우리 어머니들은 큰일이 나면 직접 고소리술을 닦아 제주(祭酒)로도 올리고, 손님 접대도 하였다 사진집『제주100년』중에서(만농 홍정표 사진)=304,303,1
부모님 돌아가신 것이 너무 서러워/가파리 송정순=311,310,1
8살 때 부모ㆍ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부모 가운데가 구술자)=314,313,1
가파도의 돌담=319,318,1
둘째 아들과 가파도에서 찍은 사진=323,322,1
1990년대 찍은 가족사진=329,328,1
어버이날 기념 가파리민 노래자랑에 참가한 송정순=339,338,1
제삿밥 열아홉 그릇 거립니께/인성리 김옥화=343,342,1
일본에서 유학할 때의 남편=348,347,1
1982년 찍은 가족 사진=355,354,1
고구마 썰어 말리기(산방산 부근,『제주100년』에서 발췌)=362,361,1
대정노인학교 졸업사진(1994)=364,363,1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에서=370,369,1
내 팔자 어딘 가민 어떵허리/조수리 송태하(이미지 참조)=373,372,1
김 메는 모습(『제주100년』에서 발췌)=376,375,1
일제 결혼식 풍경(『제주100년』에서 발췌)=382,381,1
1948년 5월 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주민들(미국립문서 기록관리청 소장)=384,383,1
부녀자들이 마을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제2연대 제주도 주둔기』앨범에서 발췌)=390,389,1
가족과 함께 나들이 가서=394,393,1
물질이 천직/한림리 문영자=399,398,1
천지연 폭포 앞에서 행복한 순간, 어촌계 회원들과 제주도를 여행한다=407,406,1
물안경, 해산물을 캐는데 해녀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413,412,1
한림 시가지의 옛 모습(『한림읍지』에서)=418,417,1
변화된 한림의 현재 모습=421,420,1
고무옷을 입고 테왁을 둘러매서 비양도 앞 바다로 물질하러 갈 때=426,425,1
깅인 칠월 나민 등 고린다/봉성리 강자숙=427,426,1
봉성리 사람들은 옛날 방아 노래를 부르면서 부저리 전설을 민요로 불렀다사진집『제주100년』중에서 발췌(만농 홍정표 사진)=430,429,1
강자숙이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인들이 남기고간 쇠를 주어다가 만들어 사용했던 도고리를 들어보이고 이다=437,436,1
장녀 결혼식 때 가족들과 함께 사진촬영을 했다 첫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남편인 김영수 그 옆이 강자숙=445,444,1
일제 강점기 봉성리에서는 부업으로 제충국을 많이 심었다 사진은 다카하시 노보루의 사진집『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중에서 1939년 명월리에서의 제충국 수확장면=455,454,1
강자숙이 제주대표로 1999년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열린 게이트볼 대회에 참가해 3위 입상한 후 동료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앉은이가 강자숙=460,459,1
정든 마을 마음의 고향/노형동 현춘화=463,462,1
4ㆍ3사건이 발생하자 마을사람들이 산으로 피신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소장)=465,464,1
곡식을 거둬들인 후 흐믓한 웃음 지금도 밭농사를 하고 있다=479,478,1
드르구릉은 시가의 본적 마을인데 4ㆍ3후 마을이 없어지고,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다=482,481,1
노형동 현재 풍경=488,487,1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농토를 개간하는 모습(『제주여성사 사진자료집1』에서)=490,4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