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五代十國·8|907~960년|·12오대십국은 위진남북조 이후 중국이 또다시 분열에 빠져든 혼란기. 북방에서는 전란이 빈번히 일어났지만 남방은 상대적으로 안정됨. 전국의 경제 중심이 황하 유역에서 양자강 유역으로 이동 북송北宋·26|960~1022년|·30진교병변 이후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립하고 그 후 몇십 년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당말 이래 계속된 분열 및 할거 국면은 종결되었지만, 송나라와 요나라 간 대치 국면 형성|1022~1067년|·53송나라와 요나라의 전쟁이 일단락되었으나 서하의 출현으로 북송이 또 해마다 전쟁 속에 빠져듦|1067~1100년|·75북송에서 내우외환이 연달아 발생하고, 비록 왕안석의 변법이 효과를 보기는 했지만 갖가지 장애 요소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감. 이 기간 중에 문학예술이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고, 과학기술 역시 크게 발전함|1100~1127년|·101송 휘종의 즉위에서 정강의 변 및 북송의 멸망까지로 북송 왕조의 최후 단계. 부패한 정권이 백성들의 기의에 타격을 받아 무너질 듯 흔들리다가 마침내 금나라의 쇠발굽 아래 패망함 남송南宋·122|1127~1189년|·126건국 초기는 금나라 정권과 대치하며 때로는 전쟁을 하고 때로는 화의를 하였기 때문에, 남송 정권은 줄곧 위태롭고 불안정함|1189~1279년|·150남송이 강남에 안거하는 데 만족하며 경제 문화를 일정 정도 발전시켰지만, 어리석고 무도한 통치로는 이미 점점 더 나빠져 가는 형세를 만회할 방법이 없었음.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40여 년이 지난 뒤 남송도 원나라의 수중에 들어감요遼·184|916~1031년|·188거란족의 수령 야율아보기가 각 부족을 통일한 뒤 거란국을 건립하고, 30년이 지난 뒤에 야율덕광이 국호를 요로 개칭함. 이들은 한족의 선진기술을 흡수하여 독특하고 특색 있는 정치와 문화를 창조함|1031~1218년|·197장기간의 흥성과 평화 국면으로 거란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다다르고 사회계급 간의 갈등이 날로 첨예화되어, 200여 년 역사의 요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됨금金·222|1115~1189년|·226완안아골타가 황제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한 후 일련의 정치·군사제도 개혁을 단행하자 나라가 신속히 강대해짐. 역사에서 ‘소요순’이라 불리는 금나라 세종의 재위기간은 금나라 사회가 가장 안정적이고 번영했던 시기|1189~1234년|·242금나라 후기에 정치 부패와 통치자들의 중원 백성 및 여진족 하층민들에 대한 약탈과 압박이 극에 달하며 거센 반항을 불러일으킴. 끊임없는 기의로 금나라의 통치권이 극도로 동요됨. 새롭게 흥기한 몽골의 대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킴원元·258|1206~1259년|·262‘일대 영웅’인 칭기즈칸이 건립한 대몽골제국이 급속히 확장되어 중국 북부의 통치권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 지역까지도 정복함|1260~1294년|·274쿠빌라이가 국호를 대원으로 개칭하고 통치권이 나날이 공고해짐.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대통일을 이룸으로써 중국이 이후 수백 년간의 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됨|1294~1368년|·295통치집단 내부의 투쟁으로 원나라의 통치 기반과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장기간에 걸쳐 널리 시행되어 온 계급 억압 및 민족 억압 정책이 결국 공공연한 사회갈등의 격화를 초래해, 홍건군의 대기의로 원나라가 패망의 종을 울리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