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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목차
제1장 『중국 자료로 읽는 6·25전쟁 정전』 해제 / 정형아 14
I. 서언 15
II. 책의 구성과 자료의 내용 20
III. 결어 29
제2장 모택동·주은래 자료를 통해 본 정전 34
2/01.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중단 담판의 원칙에 관해 소련과 논의 문제를 모택동 등에게 보낸 편지(1950년 12월 8일) 35
2/02.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중단 담판에 관한 중앙의 원칙을 오수권 등에게 보낸 전보(1950년 12월 8일) 36
2/03. 유엔주재 인도 대표 라우와의 대담원칙에 관해 오수권 등에게 보내는 전문(1950년 12월 13일) 38
2/04. 기자회견 원고의 수정의견에 대해 오수권 등에게 보내는 전문(1950년 12월 14일) 40
2/05. 라우·엔테잠과의 담화 원칙에 대해 오수권 등에게 보내는 전문(1950년 12월 16일) 43
2/06. 유엔총회가 통과시킨 '조선정전3인위원회' 결의에 관한 성명(1950년 12월 22일) 45
2/07. 조선 정전담판 문제에 관한 중국 정부의 비망록 1(1951년 1월 11일) 52
2/08. 조선 정전담판 문제에 관한 중국 정부의 비망록 2(1951년 1월 14일) 55
2/09. 조선과 기타 극동 제 문제에 관해 아벨라에즈에게 보내는 답전(1951년 1월 17일) 57
2/10. 평화회담준비 문제에 대해 팽덕회에게 보내는 전보(1951년 7월 2일) 60
2/11. 회담 장소와 회의 개최업무의 공동준비에 관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4일) 62
2/12. 개성지구의 안전보장에 관해 팽덕회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4일) 63
2/13. 속히 개성으로 가서 정전담판 업무를 준비하라고 김일성 등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4일) 64
2/14. 남일, 등화 두 사람 발표 원고에 관해 의견을 보낸 전보(1951년 7월 9일) 66
2/15. 조선에서 외국군대의 철수를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는 등에 관해 이극농에게 지시하는 전보(1951년 7월 11일) 68
2/16. 신문기자의 개성지구 진입 허가문제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2일) 69
2/17. 리지웨이에게 보내는 답신 수정문의 전문과 방송 원고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4일) 70
2/18. 리지웨이의 중립구역 획정 제안에 동의하는 것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4일) 71
2/19. 담판대표단 인원수와 중립지역 면적 확정문제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4일) 72
2/20. 기자 문제에 관한 공보의 재발송이 불필요하다고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4일) 73
2/21. 리지웨이에게 보내는 답신의 원고 수정과 방송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7월 14일) 74
2/22. 김일성, 팽덕회가 개성지역을 잠정적 중립구역으로 획정하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리지웨이에게 보내는 전문 원고(1951년 7월 14일) 75
2/23.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담판 의제에 포함하는 것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문에 추가하는 내용(1951년 7월 17일) 77
2/24.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견지해야 한다(1951년 7월 17일) 78
2/25. 철군 문제는 조선 정전담판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아도 된다(1951년 7월 23일) 82
2/26. 담판 의제 수정에 관한 발표 원고에 대해 이극농에게 보내는 전보문에 추가하는 내용(1951년 7월 24일) 85
2/27. 반드시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해야 한다(1951년 7월 28일) 86
2/28.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을 우선 해결 문제로 견지하라(1951년 8월 1일) 88
2/29. 준비를 철저히 하고, 대공세를 지연하라(1951년 8월 11일) 90
2/30. 군사분계선 및 현재의 담판 전략(1951년 8월 13일) 93
2/31. 조선 정전담판 문제에 관해(1951년 8월 22일) 96
2/32. 조선 정전담판과 대일(對日) 강화문제(1951년 9월 3일) 103
2/33. 담판 장소 변경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10월 12일) 107
2/34. 중립구역 확대문제에 관해 이극농에계 보내는 전보문에 추가하는 내용(1951년 10월 12일) 108
2/35. 상대방의 모순과 약점을 포착하여 공격하고 반박하라(1951년 11월 12일) 109
2/36. 조선 정전회담에 관한 약간의 문제(1951년 11월 14일) 112
2/37. 군사분계선 담판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1951년 11월 20일) 117
2/38. '중립국의 감독과 시찰'에 대한 담판 전략(1951년 12월 8일) 118
2/39. 적의 담판 지연을 처리하는 방법에 동의한다고 이극농에게 보내는 전보(1951년 12월 28일) 122
2/40. 현재 조선 정전담판의 대책(1952년 1월 7일) 123
2/41. 조선 정전담판 중 적에 대해 주도적으로 반격하라는 전보(1952년 1월 15일) 125
2/42. 조선 정전담판 문제에 관해 이극농에게 보낸 전보 회신(1952년 4월 22일) 126
2/43. 적들의 포로송환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1952년 7월 15일) 128
2/44. 담판 상대방이 협의를 파괴하고 우리 측 대표단 일원을 공격한 문제 등을 폭로하는 전보(1953년 2월 11일) 131
2/45. 조선 정전회담문제에 관한 성명(1953년 3월 30일) 133
2/46. 오늘날 국제적 주요 모순은 전쟁과 평화문제에 있다(1953년 6월 5일) 139
2/47. 이극농에게 보내는 전보 : 회담 재개 후의 담판은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해야 한다(1953년 7월 9일) 145
2/48. 정전협정 서명 후에도 지원군은 경계를 높여야 한다(1953년 7월 25일) 147
2/49. 말렌코프와 몰로토프의 정전협정 체결 축하에 대한 모택동과 주은래의 답사 전보(1953년 7월 31일) 148
제3장 중화민국 외교부의 자료로 보는 정전 150
3/01. 한국전쟁 정화(停火) 담판에 대한 최근 상황(1951년 10월 25일 담판은 재개되어 12월 25일까지 이어졌다) 151
3/02. 중화민국 외교부가 수집한 미국 기자 라벤홀트(Albert Ravenholt)의 당시 대만상황 관련 분석 기사(1952년 6월 19일) 174
3/03. 장개석과 클라크 장군의 담화기록(1953년 3월 25일) 177
3/04. 행정원 제292차 회의 비밀보고 : 한국전쟁 평화회담 중 포로송환문제에 관한 외교부 비밀보고사항(1)(1953년 5월 21일) 184
3/05. 한국전쟁 담판재개에 대한유럽맹방의 태도에 관해 고유균(顧維鈞)이 장개석에게 보낸 전문(1953년 5월 22일) 189
3/06. 한국전쟁 전쟁포로의 자유송환이라는 원칙에 대해 아이젠하워가 여전히 양보하지 않았다는 내용에 관해 고유균(顧維鈞)이 장개석에게 보낸 전문(1953년 5월 23일) 191
3/07. 행정원 제293차 회의 비밀보고 : 한국전쟁과 포로송환문제에 관해 외교부 비밀보고사항(2)(1953년 5월 28일) 193
3/08. 이승만과의 담화 요지에 대해 왕동원(王東原)이 장개석에게 보낸 보고(1953년 7월 5일) 197
3/09. 행정원 제301차 회의 비밀보고 : 외교부 엽부장의 한국 정전 후 거행될 정치회의에 관한 의견(1953년 7월 23일) 199
3/10. 주한대사관이 외교부에 보낸 '한국 정전문제의 발전' 등 검토보고서(1953년 7월 24일) 202
3/11. 한국전쟁 평화회담 참고자료 -1952년 9월 이후의 전개 과정을 중점으로-(1953년 7월 28일) 218
3/12. 총통의 밴 플리트 장군 접견 대화록(1953년 8월 28일) 239
제4장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가 수집한 국내외의 정전에 대한 반응 244
4/1. 조선전쟁 및 조선 담판에 대한 국내외 반응(1950년 7월 8일) 245
4/1/01. 주(周) 외교부장의 성명과 조선 문제에 대한 각계의 반응(1950년 7월 8일) 245
4/1/02. 조선전쟁에 대한 상해 거주 외국인의 반응1(1950년 7월 8일, 상해) 250
4/1/03. 조선전쟁에 대한 상해 거주 외국인의 반응2(1950년 7월 11일, 상해) 252
4/1/04. 유엔 정보국이 상해 지부에 조선 문제 반응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1950년 7월 14일, 상해) 254
4/1/05. 조선전쟁에 대한 상해 거주 외국인의 반응3(1950년 7월 17일, 상해) 255
4/1/06. 조선전쟁에 대한 상해 거주 외국인의 반응4(1950년 8월 2일, 상해) 258
4/1/07. 조선전쟁에 대한 상해 거주 외국인의 반응5(1950년 8월 17일, 상해) 259
4/1/08. 조선전쟁에 대한 홍콩 주재 외국인의 반응(1950년 9월 4일, 상해) 261
4/1/09. 조선전쟁에 대한 영국, 프랑스 영사의 반응(1950년 7월 14일, 곤명(昆明)) 262
4/1/10. 조선 문제에 대한 각계의 반응(1950년 7월 14일, 곤명(昆明)) 263
4/1/11. 미국·영국의 최근 동향(1950년 12월 2일, 광주(廣州)) 265
4/1/12. 맥아더, 필요하면 조선 주둔 부대의 일본 철수를 계획(1950년 12월 13일, 광주(廣州)) 267
4/1/13. 주석과 중앙에 보고 : 조선 담판과 정전에 대한 북경시 각 계층 인민들의 반응(1951년 7월 3일, 북경) 268
4/1/14. 조선 정전 담판에 대한 천진 외국 거류민 반응을 외교부에 보고(1951년 7월 12일, 천진(天津)) 273
4/2. 조선전쟁과 정전 담판에 대한 각국의 반응 275
4/2/01. 인도 국회가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문제 논의(1950년 8월 2일, 인도) 275
4/2/02. 조선문제에 대한 인도 각 신문의 보도(1950년 11월 12일, 인도) 277
4/2/03. 조선전쟁에 대한 스웨덴 각계의 반응(1950년 11월 6일, 스웨덴) 280
4/2/04. 조선 문제에 대한 스웨덴 신문들의 보도(1950년 12월 1일, 스웨덴) 281
4/2/05. 네루는 인도 다수의 정당단체에서 조선 문제 해결 계획에 대해 개술(槪述)(1950년 12월 4일, 인도) 282
4/2/06. 영·미(英·美)의 스웨덴에 대한정책 및 노르웨이의 조선전쟁에 대한 시각(1950년 12월 5일, 스웨덴) 283
4/2/07. 조선문제에 대한 스웨덴 외무장관의 견해(1950년 12월 13일, 스웨덴) 284
4/2/08. 주(周) 외교부장의 유엔 답변 발표 후 유럽 각 신문의 보도(1951년 1월, 스위스) 286
4/2/09. 주 외교부장의 답전에 대한 보도(1951년 1월 18일 23시, 모스크바) 293
4/2/10. 주 외교부장의 전문에 대한 루마니아 『스컨테이아(Scînteia)』지의 보도(1951년 1월 19일, 루마니아) 295
4/2/11. 주 외교부장의 성명에 대한 폴란드 신문의 논평(1951년 1월 25일, 폴란드) 296
4/2/12. 주 외교부장의 성명 후, 나타난 대략적 반응에 대한 보고(1951년 1월 24일, 버마) 297
4/2/13. 미 제국주의의 조선 파병 요청에 관한 인도, 파키스탄의 반응(1951년 5월 21일, 인도) 300
4/2/14. 영국 신문에 실린 조선전쟁 문제에 관한 영국 작전부장의 보고(1951년 5월 23일, 스위스) 302
4/2/15. 주 소련 인도 대표가 말리크 성명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요구하다(1951년 6월 25일, 모스크바) 304
4/2/16. 각 공사에게 조선 평화회담 문제를 고하다(1951년 6월 26일, 외교부) 305
4/2/17. 말리크의 건의에 대한 보도(1951년 6월 26일, 모스크바) 307
4/2/18. 말리크의 건의가 각국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다(1951년 6월 26일, 모스크바) 308
4/2/19. 인도네시아 정계는 말리크의 건의에 환영의 뜻을 나타내다.(1951년 6월 28일, 인도네시아) 309
4/2/20. 말리크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스위스 신문의 보도(1951년 6월 28일, 스위스) 311
4/2/21. 말리크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영국 신문의 보도(1951년 6월 28일, 스위스) 314
4/2/22. 말리크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미국의 보도(1951년 6월 29일, 스위스) 317
4/2/23. 말리크 라디오 방송에 대한 프랑스 부르주아 신문들의 반응(1951년 6월 29일, 스위스) 319
4/2/24. 그로미코의 주 소련 미국 대사 접견에 대한 스위스 신문의 보도(1951년 6월 30일, 스위스) 321
4/2/25. 말리크 라디오 방송에 대한 서독 부르주아 신문들의 반응(1951년 6월 30일, 스위스) 323
4/2/26. 말리크 건의에 대한 인도 여론 관련 후속 보고(1951년 6월 30일, 인도) 325
4/2/27. 조선전쟁 정화(停火)문제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계 요인의 반응(1951년 7월 2일, 인도네시아) 327
4/2/28. 정전에 대한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의 보도(1951년 7월 2일, 스위스) 329
4/2/29.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와 조선 평화회담에 대한 스위스의 태도를 논하다(1951년 7월 4일, 스위스) 330
4/2/30. 조선 담판에 대한 미국·영국·프랑스의 태도(1951년 7월 5일, 스위스) 331
4/2/31. 요(姚) 대사는 근래 조선전쟁 평화회담에 대해 버마에 팽배한 불안을 외교부에 보고(1951년 7월 12일, 버마) 334
4/2/32. 미 제국주의가 핑계를 들어 개성 담판을 중단한 것에 대한 풍(馮) 대사의 보고(1951년 7월 15일, 스위스) 335
4/2/33. 미 외교부의 조선 정전 담판 중단 원인에 대한 보고(1951년 7월 18일, 모스크바) 337
4/2/34. 스웨덴 공산당 기관지의 조선전쟁 비용 지불 문재 게재(1951년 7월 19일, 스웨덴) 340
4/2/35. 조선전쟁 비용 지불에 대한 스웨덴 신문들의 보도(1951년 7월 19일, 스웨덴) 341
4/2/36. 미국 각 매체가 보도한 개성 소식에 대한 주소련 대사관의 보고(1951 년8월24일, 모스크바) 342
4/2/37. 영국신문의 개성 담판 논평에 관한 주소련 대사관의 보고(1951년 8월 25일, 모스크바) 343
4/2/38. 미 제국주의의 개성 담판 중단 관련 영국, 스위스 신문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8월 25일, 스위스) 344
4/2/39. 미국 신문의 조선 담판 보도에 관한 주 소련 대사관의 보고(1951년 8월 26일, 모스크바) 346
4/2/40. 개성 담판 보도에 관한 주소련 대사관의 보고(1951년 8월 27일, 모스크바) 348
4/2/41. 프라하 지국이 미·영(美·英) 신문의 평화회담보도 상황을 본부에 보고(1951년 8월 30일, 프라하) 349
4/2/42. 조선전쟁 평화회담 중단 후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9월 4일, 스위스) 350
4/2/43. 개성 담판 보도에 관한 주 소련 대사관의 보고(1951년 9월 6일, 모스크바) 352
4/2/44. 조선전쟁 상황에 관한 보고(1951년 9월 11일, 모스크바) 353
4/2/45. 네델란드 부르주아 신문의 조선 담판 보도에 관한 대사관의 보고(1951년 9월 12일, 모스크바) 354
4/2/46. 조선 정전 전망에 대한 웨드마이어와 기자의 질의응답 보고(1951년 9월 12일, 모스크바) 355
4/2/47. 리지웨이가 소사(掃射) 사건을 시인한 것에 관한 반응(1951년 9월 14일, 모스크바) 357
4/2/48. 영국 신문의 조선 전국(戰局)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9월 19일, 모스크바) 358
4/2/49. 미국 『뉴욕포스트』의 조선 담판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9월 21일, 모스크바) 360
4/2/50. 평화회담 보도에 관한 총체적 보고(1951년 9월 28일, 모스크바) 361
4/2/51. 조선에 대한 외신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10월 4일, 모스크바) 363
4/2/52. 평화회담에 관한 보고(1951년 11월 18일, 모스크바) 364
4/2/53. 노르웨이가 병사 500명을 실은 군함 한 척을 조선으로 파견하는 것에 관한 군정 보고(1951년 11월 20일, 스웨덴) 366
4/2/54. 미국의 평화회담 보도에 관한 보고(1951년 12월 5일, 모스크바) 367
4/2/55. 조선 정전 담판에 대한 덴마크, 스웨덴 정부의 태도에 관한 보고(1951년 12월 11일, 핀란드) 368
4/2/56. 미국이 조선에서 양보한 원인 세 가지에 대한보고(1951년 12월 14일, 모스크바) 369
4/2/57. 트루먼의 대조선 담판 태도에 대한보고(1951년 12월 14일, 모스크바/2급 비밀) 370
4/2/58. 조선 평화회담과 관련, 미국 측은 1개월의 기한 연장을 제안할 수도 있다는 보고(1951년 12월 15일, 모스크바) 371
4/2/59. 조선 정전에 대한 미국, 영국 신문의 12월분 논조에 관한 보고(1951년 12월 31일, 스위스) 372
4/2/60. 조선 정전 담판에 대한 보고(1952년 4월 11일, 스위스) 375
4/2/61. 인도 정부의 조선 정전 담판 보도에 관한 보고(1952년 6월 11일, 인도) 378
4/3. 중국의 조선전쟁 포로송환제안에 대한 각국의 반응 379
4/3/01. 우리의 7일 새로운 제안에 대한 스위스 신문들의 보도(1953년 5월 7일, 스위스) 379
4/3/02. 남일 장군의 8개항 제안에 대한 인도의 보도(1953년 5월 8일, 인도) 382
4/3/03. 포로송환 문제의 새로운 건의에 대한 덴마크 각 신문의 보도(1953년 5월 8일, 덴마크) 384
4/3/04. 남일 대장의 새로운 건의에 대한 스웨덴 각 신문의 평론(1953년 5월 8일, 스웨덴) 385
4/3/05. 남일 장군의 건의에 대한 스위스의 반응(1953년 5월 9일, 스위스) 386
4/3/06. 5월 7일 남일(南日) 장군의 제안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1953년 5월 9일, 스위스) 388
4/3/07. 5월 7일 남일(南日) 장군 제안에 대한 미국·영국·스위스 및 연합국의 반응(1953 년 5월 12일, 스위스) 391
4/3/08. 버마 정부 대변인은 조·중측의 8개 항 제안에 지지 표명(1953년 5월, 버마) 400
4/3/09. 버마 정부 대변인은 우리의 8개 항 제안에 동의한다는 성명 발표(1953년 5월 17일, 버마) 401
4/3/10. 조선 담판 문제에 대한 버마 신문의 반응(1953년 5월 18일, 버마) 402
4/3/11. 홍콩 상공업계의 주총리 성명에 대한 반응 등(1953년 6월 2일, 광주 외사처(廣州 外事處)) 403
제5장 중화인민공화국 인사의 정전 회고 406
5/01. 1953년 조선으로 가는 중립국 관원의 전용기 임무 수행 407
5/02. 조선 전선에서 직접 경험한 정전의 밤 416
5/03. 직접 경험한 판문점 정전담판 420
5/04. 판문점 정전담판 취재의 추억 439
5/05. 판문점 풍운을 증언하다 : 시성문의 정전담판 경험 기록 454
5/06. 나는 포로 설득대표단에 있었다 469
제6장 정전 관련 참고자료 484
6/01. 트루먼의 성명에 대한 성명(『인민일보』, 1950년 6월 28일) 485
6/02. 오수권(伍修權)의 레이크 석세스 담화관련 보도(『인민일보』, 1950년 12월 18일) 487
6/03. 조선 정전 담판 첫 번째 회의에서 남일과 등화의 인사말(『인민일보』, 1951년 7월 11일) 490
6/04. 남일과 조이가 상호 교환한 서신에 관한 보도(『인민일보』, 1951년 7월 14일) 493
6/05. 병상포로송환에 관한 협정(1953년 4월 11 일) 495
6/06. 병상포로송환작업 행정세칙에 관한 조선 정전회담 쌍방의 양해(1953년 4월 11일) 498
6/07.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포로교환협정)(1953년 6월 8일) 501
6/08. 조선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 509
6/09. 정전협정에 관한 임시 보충협의(1953년 7월 27일) 532
6/10. 군사분계선 첨부 지도에 관한 설명 535
6/11. 김일성 원수와 팽덕회 장군은 정전 명령을 발표하였다(1953년 7월 27일) 537
6/12. 조·중은 5개 중립국에 두 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인민일보』 1953년 7월 28일) 539
판권기 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