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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국문초록 10
I. 서론 14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14
2. 연구사 검토 15
3. 연구방법과 연구내용 18
II. 1930년대 판소리와 창극 21
1. 판소리 단체의 등장 21
2. 판소리의 융성 25
1) 판소리 단체의 활동 25
2) 명창대회의 활성화 37
3. 조선성악연구회와 창극 정비 42
1) 창극 활동의 본격화 43
2) 창극 공연의 체계화 50
III. 1940년대 전반기 판소리와 창극 59
1. 일제하 협회 결성과 판소리·창극 단체의 향방 59
1) 조선연극협회 60
2) 조선음악협회 61
3) 조선연예협회 63
4) 조선연극문화협회 64
2. 판소리의 위축 65
1) 명창대회의 쇠퇴 66
2) 일제 관변단체 주관 연주회 73
3. 창극을 통한 '총후' 활동 76
1) 협회 초기의 창극단 활동 76
2) 창극단들의 통합과 창극의 활성화 88
3) 지방순회공연과 '이동창극' 102
4) 오-케판 〈흥보전〉의 음악적 내용과 그 특징 120
IV. 1940년대 후반기 판소리와 창극 137
1. 국악 재건 운동과 판소리·창극 단체의 향방 137
2. 판소리의 부흥 141
1) 판소리 정통성 회복을 위한 노력 141
2) 신작 판소리 〈열사가〉의 출현 150
3. 창극의 국극 지향 163
1) 국극 지향과 국극사의 공연활동 163
2) 군소 창극단의 움직임 175
3) 여성 창극단의 등장 181
V. 결론 188
참고문헌 193
ABSTRACT 198
참고악보 203
〈표 II-1〉 조선성악연구회의 정기총회 일람표 23
〈표 II-2〉 조선음률협회의 주요공연작품 30
〈표 III-1〉 1940년대 전반기 판소리 공연무대 66
〈표 III-2〉 오-케판 〈흥보전〉과 정광수 〈흥보가〉의 대목구성 123
〈표 III-3〉 오-케판 〈흥보전〉과 정광수 〈흥보가〉의 대목비교 125
〈표 III-4〉 제비노정기의 사설비교 127
〈표 III-5〉 중타령의 사설비교 128
〈표 III-6〉 놀부 박타는데 사설비교 129
〈표 III-7〉 오-케판 〈흥보전〉의 음반대목별 사용된 반주악기 132
〈표 IV-1〉 1940년대 후반기 판소리 공연무대 141
〈표 IV-2〉 〈이준 열사가〉의 대목별 장단구성 154
〈표 IV-3〉 〈안중근 열사가〉의 대목별 장단구성 154
〈표 IV-4〉 〈윤봉길 열사가〉의 대목별 장단구성 154
〈표 IV-5〉 〈유관순 열사가〉의 대목별 장단구성 155
〈표 IV-6〉 〈이준 열사가〉에 사용된 붙임새 161
〈표 IV-7〉 여성국악동호회 회원 명단 183
〈그림 1〉 창극좌의 북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05
〈그림 2〉 창극좌의 남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05
〈그림 3〉 1945년 8월 한국철도 약도 107
〈그림 4〉 조선창극단의 북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0
〈그림 5〉 조선창극단의 남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0
〈그림 6〉 동일창극단의 북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4
〈그림 7〉 동일창극단의 남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4
〈그림 8〉 반도창극단의 북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8
〈그림 9〉 반도창극단의 남부지역 장기순회공연 118
〈악보 III-1〉 흥보경사 대목(흥보 비단옷 해입는데) 133
〈악보 III-2〉 놀부 박타는 대목(놀부가 셋째 박을 타는데) 134
〈악보 III-3〉 흥보집 경개 135
〈악보 IV-1〉 근심하는 대목(진양조)의 1각 대마디대장단 158
〈악보 IV-2〉 헤이그로 떠나는 대목(중모리)의 1각 대마디대장단 158
〈악보 IV-3〉 헤이그로 떠나는 대목(중모리)의 2-3각 엇붙임 158
〈악보 IV-4〉 헤이그로 떠나는 대목(중모리)의 11각 교대죽 158
〈악보 IV-5〉 헤이그로 떠나는 대목(중모리)의 8각 밀붙임 159
〈악보 IV-6〉 헤이그 도착 대목(중중모리)의 1각 대마디대장단 159
〈악보 IV-7〉 헤이그 도착 대목(중중모리)의 14-15각 엇붙임 159
〈악보 IV-8〉 헤이그 도착 대목(중중모리)의 3각 완자걸이 159
〈악보 IV-9〉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1각 대마디대장단 160
〈악보 IV-10〉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22-23각 엇붙임 160
〈악보 IV-11〉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10각 잉어걸이 160
〈악보 IV-12〉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8각 완자걸이 160
〈악보 IV-13〉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4-5각 교대죽 161
〈악보 IV-14〉 밀서 내놓는 대목(자진모리)의 9각 밀붙임 161
본 논문은 1940년대를 그 시대가 지닌 특성에 따라 일제강점기말을 전반기로 광복 이후를 후반기로 구분하여 판소리와 창극의 활동양상을 그 사회적 배경과 함께 파악하여 1940년대 전개된 판소리와 창극의 실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40년대 전반기에 일제는 전시체제 하에 공연문화에 대한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1940년대 후반기인 광복 이후는 광복과 함께 시작된 새 시대의 도래에 따른 민족문화를 부흥하고자 열망하던 때였다. 이렇듯 1940년대는 사회적 격변기에 따른 시대적 특성이 선명하게 양분되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은 그 시대에 적응하며 1930년대 번성했던 판소리와 창극의 성과를 꾸준히 지속시키고 조금씩 성장시키며 이어질 1950년대 판소리와 창극 활동의 전망을 밝게 해 주고 있었다. 주어진 시대에 때로는 수긍하고 때로는 대응했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의 전개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0년대의 판소리와 창극은 1930년대의 융성했던 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판소리는 1930년에 결성된 조선음률협회가 판소리 정화운동과 함께 주최했던 단체의 기획물을 통해 활발히 공연되었다. 또한 이전부터 신문사와 여러 단체의 후원을 통해 판소리에 주요무대를 제공해 왔던 순수 연주회 형식의 명창대회가 전국에 걸쳐 개최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와 같은 명창대회의 성행은 판소리 공연을 융성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창극은 1934년 결성이후부터 시작된 조선성악연구회의 노력으로 판소리 작품들이 점차 창극으로 공연되었고 신작 창극까지 선보였다. 연출자와 각색자를 두고 정비에 몰두했던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은 모든 배역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며 작품에 맞는 의상을 구비하고 무대조명까지 갖추게 되었다. 나아가 다양한 반주악기가 동원되는 등 마침내 창극으로서의 형태를 완비하였다. 이처럼 번성했던 1930년대 판소리와 창극 활동은 1940년대로 지속되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1940년 12월을 시점으로 전시체제기에 따른 강력한 통제 하에 조선의 모든 문화 분야를 자신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각종 협회를 조직하고 관련 단체를 강제 가입시켰다. 이에 따라 활발히 활동 중이던 조선성악연구회는 조선연극협회에 소속되었고 단체의 주요구성원들은 조선음악협회에도 가입되었다. 이밖에 여러 군소창극단은 조선연예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하였다. 일제는 모든 공연을 일제의 허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하여 판소리 창자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일제는 민족지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켜 전국에 걸쳐 번성했던 명창대회를 사라지게 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자신들의 관변단체였던 ≪매일신보≫와 조선음악협회가 주관하는 행사를 통해서만 판소리를 공연하도록 조치하면서 1940년대 전반기 판소리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 전반기 창극의 초기 활동은 조선성악연구회와 이 단체에서 분립하여 창단한 화랑창극단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1942년 일제는 공연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 조선연극문화협회를 발족하면서 활동 중이던 여섯 개의 창극단을 세 개로 강제 통합시키고 창극 활동을 더욱 선동하였다. 창극단들은 기존 창극뿐 아니라 일제가 작품의 규제를 위해 조직한 극작가협회가 제공하는 친일성향의 작품과 흥행성 위주의 신작 창극으로 지속적인 공연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어 상용 정책에 발맞춰 창극단들로 하여금 일어극을 공연하도록 하였고 전시체제기에 따른 시국극도 공연시켰다. 나아가 일제는 식민 정책이 전국에 걸쳐 선전될 수 있도록 창극단들의 지방공연을 독려하여 창극을 그들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시켜 철저히 이용하였다. 한편 1940년대 전반기의 창극은 배역의 세분화에 따른 분창과 대화체 구사가 자연스러웠으며 창극에 수성반주를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또한 창극의 대목과 사설은 소리를 축소하거나 새로 짜 넣고 대화체 아니리를 사용하는 등 효율적으로 구사되고 있었다. 이렇게 1940년대 전반기 일제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전개되었던 판소리와 창극 활동은 광복으로 일시에 종식되었다.
1940년대 후반기 광복 직후에는 첨예한 좌우대립으로 사회는 혼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음악인들은 단결하여 일제의 음악활동을 청산하고 민족음악 수립을 통한 국악의 재건을 위해 국악원을 창설하고 주체적인 활동에 신속히 착수하였다. 특히 국악원은 산하에 국극사를 창단하고 종합공연예술형태로써 전통음악분야를 고루 참여시킬 수 있는 창극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전통 음악인들은 광복 이후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고자 전통음악을 '국악(國樂)'이라 칭하고 창극을 '국극(國劇)'이라 부르며 민족음악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기 창극은 국악원 산하의 국극사를 중심으로 공연되었다. 국극사는 기존 창극뿐 아니라 새 시대에 따른 새로운 작가들의 참여에 의한 신작 창극을 선보이며 일제강점기의 창극 활동에 대한 잔재를 청산하고자 노력하였다. 광복이후에는 국극사 이외에도 여러 군소창극단이 활동하며 창극을 활성화하는데 일조하였다. 특히 광복 직후에 결성된 광주성악연구회는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국극사에 앞서 판소리 창자들을 신속히 결집시켜 산하에 창극단을 결성하고 창극공연을 이끄는 선도적 역할을 하여 이후 국극사의 창극 활동에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국극사 창단 이후에 결성된 여성창극단체는 등장과 함께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며 차후 창극의 다양화에 따른 공연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처럼 1940년대는 전반기의 일제에 의한 통제와 후반기의 광복에 따른 새 시대라는 이 시기가 지닌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혼란했다. 그러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은 이러한 공연환경 속에서도 1930년대에 이뤄낸 판소리와 창극의 성과를 지속과 성장으로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940년대에 전개된 판소리와 창극은 1950년대로 이어질 판소리와 창극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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