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즉흥 연주의 비밀부터 장소에 따라 변하는 암기 능력까지 인간의 몸은 어떻게 ‘할 수 있게’ 되는가?
『몸은, 제멋대로 한다』는 산토리학예상 등을 수상한 일본에서 손꼽히는 인문학자 이토 아사가 최고의 과학자들과 함께 우리 몸의 ‘할 수 있음’에 대하여 고찰하는 책이다. 본래 장애와 질병을 주로 연구하던 저자는 다섯 명의 이공계 연구자들을 인터뷰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 몸의 숨은 가능성을 탐구한다. 피아니스트의 연주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기술, 투수의 투구 동작을 분석하며 드러나는 몸의 비밀, AI 기술이 바꿔놓은 언어 학습의 새로운 방법론, 실시간 코칭 기술로 극대화하는 신체의 운동 습득 능력 등 다섯 과학자의 연구는 모두 ‘의식을 앞질러 제멋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몸’을 보여준다. 저자는 ‘할 수 있다=뛰어나다 / 할 수 없다=열등하다’라는 능력주의에 의문을 던지며 몸의 관점에서 ‘할 수 있다’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인간이 기술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다섯 명의 과학자와 만난 인문학자 첨단 기술을 통해 몸의 가능성을 탐구하다
오랫동안 장애와 이타 등을 주제로 연구해온 이토 아사. 질병과 장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 수 없는’ 몸의 가치와 고유성을 고민해온 저자는 주로 장애가 있는 몸이 어떻게 세상을 받아들이는지를 연구해왔다. 그런 그가 첨단 기술을 다루는 다섯 명의 과학자와 공동 연구를 시작한다. 주제는 바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가?’.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는 피아니스트의 숨은 연주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려 하는 소니 컴퓨터사이언스 연구소의 후루야 신이치, 전설적인 프로야구 투수의 투구 동작을 정밀 분석하여 ‘멋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몸’의 실체를 밝히는 NTT 커뮤니케이션 과학기초연구소의 가시노 마키오, 운동 중에 실시간으로 움직임을 데이터화하고 ‘경기를 뛰면서 배우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도쿄공업대학교의 고이케 히데키,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암기 능력에 대한 실험이나 참가자들에게 가짜 꼬리를 움직이도록 시키는 단체 실험을 통해 학습의 숨은 속성을 밝혀내는 게이오기주쿠대학교의 우시바 준이치, 세계 최초로 멀티 터치를 발명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1인자로 인간의 ‘목소리’를 활용한 다채로운 학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도쿄대학교의 레키모토 준이치다. 다섯 과학자의 연구는 주제도 소재도 모두 다르지만, ‘의식을 앞질러 제멋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몸’을 다룬다는 점은 같다. 이토 아사는 이들의 연구를 통해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변화가 ‘몸의 자유분방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인식한다. 그러한 새로운 인식 덕분에 독자는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생각대로 제어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것이라는 단편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인간 몸의 진정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몸에 배신당하고 있다 몸은 어떻게 ‘할 수 있게’ 되는가?
후루야 신이치가 피아니스트를 위해 만든 기구 ‘외골격’. 로봇 장갑처럼 생긴 이 기구는 프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움직임을 계측해서 기구를 착용한 초보자의 손가락에 계측한 데이터를 출력한다. 초보도 외골격을 착용하면 프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처럼 손가락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외골격을 60명의 피아니스트와 음대생에게 사용해보게 했다. 평소 어려워하던 연주 기법을 외골격으로 체험해본 사람들은 외골격을 벗은 뒤에도 손가락이 전과 달리 쉽게 움직였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1년 간 에이스로 활약했던 구와타 마스미. 가시노 마키오는 연구소에서 구와타에게 “똑같은 자세로 30번 던져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30회의 투구는 손에서 공을 놓는 지점이 매번 달랐고 그 차이도 컸다. 일반적으로 투구라는 행위에 기대하는 것은 기계와 같은 정확한 제어 능력이다. 그러나 구와타는 똑같이 던지려 노력했음에도 첫 번째 투구와 서른 번째 투구의 공을 놓는 지점이 머리 하나 정도나 차이가 났다. 놀라운 것은 공을 던지는 위치가 매번 달랐는데도 제구력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와타의 공은 매번 같은 자리로 정확히 들어갔다. 이 두 실험은 인간의 몸이 가진 의외성을 드러낸다. 몸이 뇌의 지배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우리 몸은 의식과 상관없이 움직이기도 한다. 몸은 때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와 다르게 움직이며, 뇌가 이미지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몸이 앞서서 움직여 멋대로 문제를 해결해버리기도 한다. 만약 몸이 뇌가 제어하는 대로만 움직인다고 가정해보자. 뇌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에 대해 어떤 이미지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미지가 없으니 몸에 명령을 내리지도 못한다. 명령을 받지 못한 몸은 움직일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새로운 동작이나 새로운 운동을 시도할 수도 없다. 뇌가 제어하는 대로만 몸이 움직인다면, 아기는 걷지 못하고 수영 초보는 물에 뜨지 못하며 누구도 자전거를 배울 수 없다. 몸이 뇌를 추월해서 멋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운동을 할 수 있고, 몸이 무언가를 해낸 다음 뇌가 ‘아, 이런 거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그러니 몸의 성공은 곧 뇌의 패배이며, 사람들이 흔히 승리라 여기는 ‘할 수 있다’에는 사실 패배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몸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정 첨단 기술은 어떻게 몸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기술을 이용해 몸이 갖고 있는 미지의 가능성을 더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고이케 히데키는 첨단 영상 기술을 이용한 실시간 코칭을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동시에 부족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모든 코칭은 경기가 끝난 뒤, 동작이 이루어진 뒤, 이미 운동을 마친 뒤에 이루어진다. 만약 운동을 하는 중에 실시간으로 코칭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몸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이케 히데키는 AI를 활용한 영상 기술을 통해 운동의 한복판에서 몸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길을 모색하고, 나아가 학습의 양상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 한다. 우시바 준이치는 우리 몸이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의 ‘꼬리 흔들기 실험’은 학습 과정에서 변화하는 뇌파 양상에 관한 대표적인 실험이다. 열 명의 실험 참가자들을 각자의 터치스크린 앞에 앉히고 뇌파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며 ‘화면에 보이는 꼬리를 흔들어라.’라고 지시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꼬리가 없기에, 특정 주파수 뇌파의 진폭이 늘어나면 화면 속 꼬리가 움직이도록 미리 프로그램을 짜두었다. 참가자들은 없는 꼬리를 움직이기 위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감각을 작동시키려 하는데, 그 결과 우리는 학습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시바 준이치는 인간이 학습할 때 보상과 처벌이 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리고 환경에 따라 뇌의 학습 능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주목하여 뇌 손상을 입은 뇌졸중 환자가 새로운 신경 경로를 개척해 팔을 움직이도록 돕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몸이 뇌보다 앞서 제멋대로 움직일 때 기술이 몸과 연결되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찰하는 두 과학자의 연구는 운동과 학습의 관점에서 새로운 몸의 가능성을 증명해낸다. 또한 기술은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조해야 하며, 기술은 두드러지지 않을수록 좋다는 두 연구자의 말은 기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능력주의에 대한 의문을 던지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스마트폰 화면을 여러 손가락으로 제어하는 스마트스킨 기술을 발명한 레키모토 준이치. 레키모토는 음성 인식 기능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시프트키로 활용하는 기술, 의태어를 활용해 운동 학습의 효율을 높이는 기술 등 목소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이 가진 능력을 확장하고자 한다. 레키모토는 또한 학습에 관한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AI 음성 변환을 통해 만들어낸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는 내 모습’ 영상. AI를 이용하면 우리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이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할 수 없는 사람일까? 레키모토의 AI를 이용한 합성 영상은 우리에게 능력이 확장된 듯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할 수 있다’란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할 수 있다=뛰어나다 / 할 수 없다=열등하다’는 이분법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는 생산성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그저 차이에 불과한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에 능력주의적 가치 판단이 끼어들어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하고,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곤 한다. ‘할 수 있다’는 오랫동안 ‘능력’, ‘뛰어남’, ‘생산력’, ‘성공’ 등의 키워드와 얽혀 오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몸의 관점에서 보면 ‘할 수 있다’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첨단 기술과 연결된 몸이 의식에 앞서 어떤 일을 해낼 때, ‘할 수 있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사이에 놓인 광활한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술과 현명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을까?
책속에서
[P. 16]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걷기도 말하기도 쓰기도 때리기도, 전부 처음에는 할 수 없었던 행동입니다. 하지만 전부 어느새 ‘할 수 있는 일’로 변했지요. 다시 말해, ‘의식이 몸을 완전히 지배한다.’라는 가설은 처음부터 틀린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의식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일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P. 22] 저는 지금까지 장애나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분들로부터 ‘할 수 없는 것의 가치’를 배워서 그러한 이분법을 상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에는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몸의 가능성과 합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개개인의 고유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공계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저는 ‘할 수 있다’도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 연구에서 제 눈앞에 펼쳐진 것이 실은 제가 ‘할 수 없다’를 매개로 찾으려 했던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생겨나는 가능성’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