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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랑 - 『The Moon and Sixpence』
·그냥 씨익 웃음이 나왔다 - 『구운몽』
·관계없음으로 더 강하게 관계되는 - 『Animal Farm』
·일지반해一知半解의 책 - 『삼국유사』
·답이 아닌 생각을 얻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異常함을 깨단하다 - 『이상소설전집』
·음악 들으며 읽는 책 - 『A Midsummer Night’s Dream』
·新話인가? 神話인가? - 『금오신화』
·신화는 미래의 이야기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더 아름답기 위해서 예술가가 범하지 못할 법칙은 없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신화는 참 힘이 세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폭 넓은 독서력과 에디톨로지 기법
-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저녁에도 희망은 있다 - 『남아 있는 나날』
·내가 탄 욕망의 열차는 어디서 멈추나?
- 『A Streetcar Named Desire』
·유정한 『무정』 100년에 읽다 - 『무정』
·거짓말로 끝나는 진짜 사랑 이야기 - 『Aimez-Vous Brahms…』
·영웅은 혼자 살지 않는다 - 『홍길동전』
·삶과 기다림 - 『고도를 기다리며』
·古小說은 참 ‘고소하다’ - 『춘향전』
·순수에 대한 인간의 갈망 - 『The Catcher in the Rye』
·다시 안개 속으로 - 『무진기행』
·惡의 거울에 비춘 人間 - 『Wuthering Heights』
·마당보다 더 깊은 가난 - 『마당 깊은 집』
·먼 천둥 - 『설국』



·눈길은 ‘눈물의 길’이었다 - 『눈길』
·두 개의 자아, 규명이 불가능한… - 『지킬 박사와 하이드』
·나쁜 제목의 좋은 소설 - 『Pride and Prejudice』
·정신적 승리는 패배자의 변명이다 - 『아큐정전』
·조르바,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요 - 『그리스인 조르바』
·‘마음’일까? ‘양심’일까? - 『마음』
·꿈의 맛 - 『데미안』
·미상불未嘗不 연암 - 『열하일기』
『열하일기 1』
『열하일기 2』
『열하일기 3』
·큰 느낌의 ‘만나봐야…’ -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여행은 창조의 씨앗 뿌리기다 - 『Bieguni』



·옳지 않은 말이 없고 버릴 말은 더욱 없다 - 『그리스 로마 에세이』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 『바람만이 아는 대답』
·우물쭈물이 아니었다 - 『Bernard shaw-지성의 연대기』
·‘비극’이란 말이 너무 작다 - 『리어 왕』
·“눈 내리는 모든 밤은/ 눈과 어둠으로 더욱 깊어지고” - 『닥터 지바고』
·네가 죄 짓지 않아도 죄라고 하면 죄이니라 - 『물에 잠긴 아버지』
·‘음악의 씨앗을 허리춤에서 분수처럼 쏟아 내놓’는 악기
- 『콘트라베이스』
·개츠비의 위대함은? - 『The great Gatsby』
·별 하나에 윤동주, 윤동주 - 『소설 윤동주』
·자유를 갈망하는 여인의 꿈 - 『황진이』
·“선형용善形容이라” - 『한중록』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다
- 『그 여자 전혜린』
·독서 논문
영웅은 어떻게 살고 죽는가?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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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삶을 위한) 반려도서 갤러리 : 문무학 서평 모음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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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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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되고 싶다면

■ 꾸준함의 미덕


『반려도서 갤러리-내가 있는 삶을 위한 서평 모음』은 서평 모음집이다. 책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고, 서평을 쓴 책의 책이다. 내 삶에 나를 세우는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절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쉽기만 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꾸준히 책을 읽고 쓴 서평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서평을 쓰려면 토론과 사색의 과정을 통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 내가 걸어 나오는 것이다.

■ 내가 있는 삶을 위한 서평 쓰기

우리는 모두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가 되는 길은 그 분야의 책을 펴내어 저자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서평 쓰는 버릇을 들이면 그것이 모여 책이 된다. 그러면 저자가 되어 ‘내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전문가가 되어 그 그룹의 리더가 될 수 있다. 책과 친하지 않은 리더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는다.

책에서 지혜를 얻으려면 책을 잘 읽어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책을 잘 읽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책을 잘 읽는 사람은 독후 활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것으로 그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다가 마는 길이다. 책 읽기의 수확은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 활동에서 비롯된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며 서평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 책이 가졌던 것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된다.

■ 휘발성 독서가 아닌 남는 독서, 서평

서평을 쓰면 책의 내용이 기억된다. 기억이 중요한가? 기억하지 않으면 활용할 수가 없다. 책 읽고 그만 던져두면 휘발성 독서가 되지만, 서평 한 번 쓰면 남는 독서가 된다. 그 남는 것이 무엇인가? 창조의 씨앗이며, 지혜의 싹이며, 삶의 격을 높이는 사다리다. 책을 읽고 거둘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책 밖에 있다. 그 방법은 이 책의 자매편 『내가 있는 삶을 위한 반려도서 레시피』가 상세하게 가르쳐준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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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5] 『달과 6펜스』라는 소설 제목 속, 한글 ‘과’는 둘 이상의 사물을 같은 자격으로 이어주는 접속 조사다. 영어 ‘and’도 보통 어·구·문을 대등하게 잇는 문법 기능을 가진다. 그러고 보니 접속 조사는 참 힘이 세다. 전혀 같은 자격으로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같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이 같이 있는 제목에서 풍기는 이 강한 흡인력, 무엇인가 다른 생각들로 차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제목을 삶의 ‘품격과 천격’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싶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의해서다. 그것이 더 이상의 상상을 불허한다. 그러고 보면 이때의 해설은 책 읽기에서 독毒 한 줄이다.
『달과 6펜스』가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Paul Gauguin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년의 증권 브로커가 탈 없이 잘 살다가 느닷없이 화가가 되겠다고 처자며 직업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집을 나가 버린다. 그는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다가 태평양의 외딴 섬 타히티로 간다. 그 섬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되었지만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를 갖는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다 해도, 작가의 심정적 개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머싯 몸은 1874년에 태어났고 『달과 6펜스』는 1919년에 출판되었다. 작가의 나이 45세, 마흔의 한 중간이다. 이때 작가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 그가 몇 살에 집을 뛰쳐나갔던가? 작가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같은 마흔 중반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과 전혀 관계가 없을까? 그냥 지나쳐버려도 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도입부에서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용서해 주고 싶다.”(8쪽)고 했다. 이는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과 뻔뻔스러움을 용서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예술은 그런 부도덕과 뻔뻔스러움을 먹어야만 꽃으로 피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서 스트릭랜드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그림,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그려진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모조리 탈 때까지,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떠나지 말라”(298쪽)는 유언을 남긴다. 그 유언을 그의 아내 아티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걸작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사라져서 더 위대한 걸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마저 작가의 개성이라는 보자기에 싸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또 어떤가?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152쪽)라는 말이나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159~160쪽)는 문장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가의 사랑, 아니 스트릭랜드 사랑에 대해서 “애정에 대한 개념이란 개성에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에게도 자기 나름의 사랑법이 있을 것이”(160쪽)라고 한다. 예술에서 개성이라는 말에 그 어떤 일이라도 용서하고도 남을 가치가 정말 있기는 한가. 이는 결국 예술지상주의와 다름없다. “스트릭랜드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221쪽)는 판단 때문이다.
『달과 6펜스』는 고전이다.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단답형이 아닌 예술과 사랑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술과 사랑이 궁금하고 예술을 사는 삶이 어떤가가 궁금해진다면 이 책을 펼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답은 없다. 이 책은 단지 생각을 더 깊고 넓게, 또 오래 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읽는 사람이 그 답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그 짜릿한 경험을 맛보고 싶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을 더 깊게 해줄 다음 문장들에 나는 밑줄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17쪽),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70쪽) 6펜스로는 살 수도 없고, 어쩌면 6펜스로 사고 남을 말이기도 하다.

- 1장 ‘예술과 사랑 - 『The Moon and Sixpence』’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