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표지이미지

- 청구기호: 320-21-6

- 서명: 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 편/저자: 버나드 크릭

- 발행처: 후마니타스(2021-04)

서평
 정치는 타협하고 협상하는 생물이다
서평자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발행사항
 546 ( 2021-09-29 )

목차보기더보기

1. 정치적 지배의 본질
2. 이데올로기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3.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4. 민족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5.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6. 정치의 친구들로부터 정치를 옹호함
7. 정치를 찬미함

서평보기더보기

정치란, 그리스신화의 거인 안타에우스처럼, 어머니 대지 위에 굳건하게 두 발을 딛고 있는 한, 영원토록 젊고 강하며 생동감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p.19) 소소한 몸짓과 일상의 언어조차 정치로 치환되는 정치 독존(獨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늘 정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버나드 크릭의 『정치를 옹호함(In Defence of Politics)』을 권한다. 책을 꼼꼼히 뒤져 보면 야단법석의 정치판을 오가는 정치가와 정치꾼들의 교언영색들이 ‘정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있다. 집필 배경이 된 1950년대 중반의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혼돈과 가치 아노미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사이비정치와 유사정치, 각종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무엇이 정치인지, 어떤 정치가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피델 카스트로가 “우리는 정치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혁명을 통해 정치인들을 몰아내었습니다”라고 조롱했을까? 자존심 상한 청년 정치학도 크릭(1929-2008)의 억울함과 비분강개가 『정치를 옹호함』으로 응결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후 60년의 세월 동안 5판이 출간되면서 일반 가정집의 책장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고전 중의 한 권으로 자리 잡았다. 크릭은 정치와 정치학에 대해 제대로 된 변명을 하고 싶었다. 크릭의 또 다른 저서인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Democracy : a very short introduction)』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정치를 사랑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데올로기, 민주주의, 민족주의, 기술주의라는 이념적 제도적 틀에 갇힌, 정형화된 ‘정치’를 구출하고자 했다. 좌우 이념 갈등의 냉전시대에 정치를 이데올로기나 이념의 잣대로 환원하려는 시도와 관료제와 기술주의에 현혹되어 정치를 행정으로 치환하려는 시도에 맞서 ‘정치’를 제자리에 안치시키고자 했다. 크릭은 정치를 ‘행위’라고 말한다. 정치는 자연적 사물이나 인간이 활동을 멈추어도 계속 존재하는 예술 작품 같은 물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행위’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상을 향한 아집이나 자기 이익을 위한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사회적 관계를 따르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제한되는 사랑처럼 공공질서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다. 정치는 이데올로기를 사칭한 일탈이나 불의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모든 개성과 다양성을 억지로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하면 그 조직은 극도로 비정상적이고 자기 파괴적이 된다. 정치는 고정된 목표들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며 이데올로기가 정치 종말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정치는 이념으로 대체되지 않으며 어떠한 신조나 신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유연하며 지저분하고 복잡한 실천의 연속이다. 그래서 ‘달래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를 통해 다채로운 생각들이 경합하고 조율될 수 있는 정치 공간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편견과 선입견도 지적한다. 크릭 역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학자의 한 사람이지만 민주주의를 만병통치약으로 오인하는 것을 경고한다. 인민주권을 규정한 헌법을 만들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나치독일과 중국공산당의 사례를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와 정치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론에서 말한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불의(不義)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말처럼 독재권력이 민주주의의 칼을 휘두른다고 ‘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칫 호도된 민주주의로 인해 정치가 홉스가 이야기한 절대권력 리바이어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정치는 네 가지 수준에서 정의된다. ‘통치기술로서의 정치’, ‘공적 업무로서의 정치’, ‘권력으로서의 정치’, ‘타협과 합의로서의 정치’가 그것이다. 통치기술로서의 정치는 이스튼(David Easton, 1917-2014)이 정의한 ‘사회적 재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담당하는 국가에 관한 것을 말한다. 공적 업무로서의 정치는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의 권리와 의무 등 정치참여에 관한 것을 말한다. 권력으로서의 정치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의 억압적 속성을 말하는데 권력이 가진 힘과 강제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타협과 합의로서의 정치는 정치의 방법론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가능성의 기예’를 말한다. 크릭이 옹호하고자 하는 정치는 바로 타협과 합의의 정치를 말한다. 그래서 크릭은 정치를 주어진 통치 단위에서 전체 공동체의 복지와 생존에 기여하는 각각의 중요성에 비례해 권력의 몫을 부여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정치를 옹호함』은 다소 난해하고 무질서한 서술로 일관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더 집중하고 더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환갑이 다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금방 낚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처럼 독자들의 가슴을 펄떡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정치인지,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난해하고 복잡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시공을 넘나들며 아리스토텔레스, 홉스와 스탈린, 마오쩌둥, 카스트로 같은 정치 고수들과 정치 철학자들을 한 줄에 꿰는 기술도 일품이다. 참으로 의미 있는 반성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귀한 이야기를 우리들의 언어로 풀어주신 이관후 박사님의 정성이다. 참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