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관념>, <욕망의 모호한 대상>, <분노의 주먹> 같은 예술영화에서부터 <귀여운 여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장르영화까지, 이러한 멜로드라마 영화들과 오페라의 운명적인 만남에 주목하여, 주옥같은 아리아들이 수많은 걸작 영화들 속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하였다.
음악이 흐르듯 유영하는 카메라 움직임, 인물들을 감싸고 도는 아름다운 멜로디들, 이야기 전개를 암시하는 음악적 라이트모티브 등 영화에서 때로는 음악(오페라)이, 이야기나 이미지보다도 더욱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영화감독들이 오페라에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거나, 유명한 아리아를 영화 속 주제 전달이나 이야기 전개 암시, 극적 긴장감 조성, 인물의 심리 묘사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좌파 감독 조셉 로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은 각각 오페라 <돈 조반니>와 <메데아>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영화화하였고, 멜로드라마의 거장인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는 주로 베르디 오페라의 아리아를 영화 속에 대거 끌어들였으며, 루이스 브뉘엘은 데뷔작과 마지막 작품에 바그너의 ‘죽음’의 음악을 상징적으로 이용하였다. 재즈 연주자이기도 한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도 오페라를 만날 수 있으며, 스릴러를 주로 만들었던 히치콕도 남녀의 사랑하는 감정이 증폭되는 장면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슬픈 선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라 트라비아타>, <나비 부인>, <마술 피리>,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이탈리아의 베르디와 푸치니, 그리고 모차르트와 독일의 바그너의 오페라가 많이 소개되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이 대표적인 오페라 국가이고, 또한 필자가 네 작곡가를 가장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 오페라들을 통해 독자들은 독일의 성스러운 낭만주의적 오페라와 이탈리아의 세속적인 멜로드라마 오페라 사이의 차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예술 장르인 오페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32편의 작품에 대한 줄거리, 각 오페라의 감상 포인트, 주요 아리아의 내용, 추천 CD와 DVD 목록을 실었다. 필자를 매혹시킨 마리아 칼라스와 엔리코 카루소 등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해설 또한 오페라를 감상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씨네 21』에 연재됐던 ‘영화와 오페라’ 칼럼 50편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필자 한창호는 영화의 상상력이 미술을 어떻게 이용했는가를 그려낸 전작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를 출간한 바 있다.
2. 죽어가는 예술 오페라, 스크린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다 - 영화는 오페라를 어떻게 이용했나?
유명한 오페라를 영화로 만든 것을 ‘오페라 필름’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페라가 발달한 이탈리아에서 특히 많이 만들어졌다. 오페라 필름 외에도 여러 감독들이 잘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를 부분적으로 영화 속에 끌어들였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오페라 주인공의 아리아를 들려주며 이야기 전개의 방향을 암시하거나, 극중 인물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하는 데 오페라를 특별히 이용해왔다. 때로는 감독이 영화에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아리아가 영화 내내 흘러나와 오페라의 아름다움이 스크린을 압도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오페라를 필름에 담다 * 조셉 로지의 <돈 조반니> -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에서 새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는 귀족 남자의 일탈된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 좌파 감독 로지는 무정부적인 태도와 윤리를 가진 귀족 돈 조반니에 주목하였고, 돈 조반니와 세 여성과의 관계를 격변기를 맞은 당시 계급 간의 갈등으로 해석하였다.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메데아> - 케루비니의 <메데아> : 마리아 칼라스가 유일하게 출연한 <메데아>는 당시 오나시스에게 버림받은 칼라스의 비참한 상황과 겹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리스로 대표되는 이아손이라는 영웅과 야만을 대표하는 오리엔트의 메데아라는 여자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파멸을 그린다. 그러나 칼라스의 친구이기도 한 파졸리니는 메데아의 시선으로 서양의 그리스를 그리고 있다. 그리스는 유럽의 잔인한 제국주의로, 오리엔트는 제국의 침범을 받는 제3세계로 묘사된다.
◇ 오페라, 이야기 전개를 암시하는 음악적 라이트모티프 * 마틴 스코시즈의 <분노의 주먹> -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제이크 라모타가 혼자 섀도 복싱을 하고 있는 영화 도입부. 이때 흐르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인터메초)’은 멜로디가 지극히 고요하고 감상적이어서 전원 찬가로 이해하기 쉬운데, 사실 이 곡은 오페라에서 롤라의 남편이 저주와 복수를 맹세한 뒤에 나온다. 링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한 라모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운명이 불안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간주곡이 암시하는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파멸의 긴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운명은 오페라 속의 주인공처럼 결투를 만나,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 빌리 와일더의 <하오의 연정> -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 순진한 처녀 아리안은 아버지뻘 되는 늙은 바람둥이 백만장자 프랭크를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만난다. 이곳에서 아리안이 프랭크로부터 눈을 떼지 못할 때, 금지된 사랑이어서 더욱 애틋한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트린스탄과 이졸데>의 서곡 ‘사랑의 죽음’이 흐른다. 무대에선 금지된 사랑의 찬가가 연주되고 있고, 아리안은 불나비처럼 그 금지된 사랑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 아리아를 통해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 : 영화에서 프란체스카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삼손과 데릴라>의 유혹적인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를 듣고 있을 때, 밖에서 로버트의 지프가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다. 집에 매여 있는 프란체스카는 지프와 여행이 상징하는 자유로운 남자 로버트 앞에서 아리아의 가사대로 ‘새벽의 키스에 꽃들이 열리듯’ 자신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 왕가위의 <2046> - 벨리니의 <노르마> : 차우가 사랑하는 호텔 주인의 큰딸이 등장할 때마다 그녀의 주제음처럼 <노르마>의 ‘카스타 디바’가 흘러나온다. ‘카스타 디바’는 노르마가 조국의 평화뿐 아니라 질투로 불타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까지 간절히 바라며 부르는 노래이다. 이 아리아를 통해 영화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통제하려는 큰딸의 염원이 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의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 차오가 큰딸을 바라보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염원하는 것처럼 들린다. * 게리 마샬의 <귀여운 여인> -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 에드워드는 창녀 비비안에게 화려한 드레스를 사준 후 오페라를 보기 위해 극장에 데려 간다. 신분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창녀 비올레타에게 강렬한 동일시를 느낀 비비안은 점점 극 속으로 몰입해 들어간다. 무대에서 비올레타가 “앞으로도 너의 곁에 있을 거야, 영원히”라고 울면서 노래 부르고, 사랑하는 남자의 곁을 도망치듯 떠나가는 장면을 볼 때, 비비안의 눈도 물기에 젖는다. 그녀도 이 오페라가 끝나면 에드워드와의 계약이 끝나고, 자기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 영화, 오페라에 오마주를 바치다 * 장 자크 베넥스의 <디바> - 카탈라니의 <라 발리> : 쥘이 녹음한 테이프와 마약조직을 고발하는 테이프를 놓고, 경찰, 마약조직, 대만계 범죄단 등 세 그룹이 쫒고 쫒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스릴러의 형식을 가진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구성력 자체가 경탄할 만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영화적 장치가 아리아 ‘그렇다면? 나는 아주 멀리 떠나리라’를 찬미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일 정도로, 영화는 오페라 <라 발리>의 아름다움에 집중돼 있다. 이 아리아는 영화에서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연주되는데, 도입부에 소프라노가 부르는 이 아리아로 시작하고, 결말도 역시 이 아리아로 끝맺는다.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 푸치니의 <나비 부인> : <나비 부인>의 미국인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처럼, 영화 에서는 프랑스의 백인 외교관 갈리마르와 중국의 경극 가수 릴 송 사이에 불같은 사랑이 싹 튼다. 영화는 오페라와 달리 남성이 비극의 중심에 놓인다. 결국 ‘명예롭게 살지 못한다면, 명예롭게 죽으리’의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갈리마르는 나비 부인처럼 자결하고 만다. 인종적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이야기 부분은 약화되고, 그 자리에 푸치니의 비극적인 음악이 시종일관 영화 속에 흐르며, 슬픈 선율이 스크린을 압도한다.
3. 오페라를 사랑한 거장 감독들 루키노 비스콘티, 루이스 브뉘엘, 잉마르 베리만, 우디 앨런…. 이 감독들의 공통점은 클래식 음악, 그중에서도 ‘오페라’를 즐겨 들었고, 아름다운 아리아를 스크린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특히 20편의 오페라 공연을 연출해온 비스콘티 감독은 오페라계에서도 거장으로 평가받았으며, 최근에는 우디 앨런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등이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극장에서 연출 데뷔를 앞두고 있는 등, 상당수의 영화감독들이 영화계와 오페라계를 넘나들며 작업해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오페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영화감독을 살펴보고, 그들이 영화 작업과 오페라 작업을 어떻게 병행해왔고, 특별히 좋아하는 오페라를 영화 속에 어떻게 이용했는지,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에서 공통되는 음악 요소는 무엇인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웰스와 히치콕, 스코시즈와도 협업해온 영화음악계의 대가, 버나드 허먼도 ‘영화와 오페라의 관계’로 볼 때 주목할 만한 영화음악 감독으로, 책 속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 루키노 비스콘티, 영화감독과 오페라연출 두 분야에서 거장으로 대접받다 수록 작품: <백야>, <벨리시마>, <센소>, <강박관념>, <루트비히> 비스콘티는 영화감독뿐만 아니라 오페라 연출가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일생을 통해 17편의 장편영화와 20편의 오페라를 감독했다. 영화와 오페라 두 분야 모두에서 거장으로 대접받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베르디의 오페라 연출에 독특한 솜씨를 보였고, 1955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는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그런 만큼 비스콘티의 영화는 발단, 전개, 위기, 그리고 절정과 결말이 따르는 4막의 오페라처럼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치 오페라를 보는 듯하다. 비스콘티의 데뷔작 <강박관념>에서 조반나가 지노를 만나 욕정을 불태울 때, 연주되는 ‘프로방스의 바다와 대지’는 <라 트라비아타>처럼 치정극을 벌이게 될 두 연인의 불길한 만남을 암시한다. <벨리시마>에서는 어린 딸이 연기를 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반어법적으로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의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 루이스 브뉘엘, 데뷔작과 마지막 작품에 바그너의 곡을 남기다 수록 작품: <비리디아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 바그너를 좋아하는 브뉘엘은 데뷔작 때부터 그의 음악을 끌어 쓴다. 초현실주의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를 발표하며, 그는 이 고전 무성영화의 피아노 반주곡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용한다. <황금시대>에도 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용하는데, 영화 속 두 연인이 정원에서 ‘미친 듯’ 사랑할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브뉘엘이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했던 사실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도 발견된다. 이번에는 <발퀴레>를 이용한다. 이렇게 그는 우연하게도 영화감독을 시작하며, 또 영화감독의 삶을 끝내며, ‘죽음의 작가’인 바그너의 음악을 자신의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
◇ 잉마르 베리만, <마술 피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다 수록 작품: <늑대의 시간> 베리만은 오페라 연출도 몇 번 진행한 경험이 있을 만큼, 오페라에 대한 조예가 깊다. 특히 애착을 보인 작품이 <마술 피리>로, 1973년에는 ‘오페라 영화’로까지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작곡대로 공연을 하고 그 모습을 필름에 담은 것이다. 영화연출가답게 자신의 시각도 보탰는데, 여자 주인공인 파미나는 ‘밤의 여왕’과 사라스트로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암시다. 영화 <늑대의 시간>에서, 백작의 동료는 <마술 피리> 공연을 마치며 <마술피리>는 인간이 작곡할 수 있는 ‘예술의 극치’이고, 죽음에 대한 모차르트의 통찰력이 돋보인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남자의 대사는 베리만의 <마술피리>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대신 표현한 것이다.
◇ 우디 앨런, 재즈에 오페라를 섞다 수록 작품: <한나와 그 자매들>, <매치 포인트>, <뉴욕 스토리> 우디 앨런은 클라리넷 연주자로,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순회공연도 벌이는 재즈 플레이어이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재즈에 서양고전음악을, 특히 오페라를 섞는다. 최근에 상영된 <매치포인트>는 오페라의 아리아들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스릴러이다. <사랑의 묘약>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크리스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댈 때면 어김없이 반복해서 연주된다. 크리스가 살인을 결심하고 노라의 집으로 갈 때는, <오텔로>의 ‘나쁜 데스데모나’가 흐르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약 10분간 이어지는 크리스의 살인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오텔로의 분노와 이아고의 집요한 음모가 맞붙는 남성 듀엣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 버나드 허먼, 웰스.히치콕.스코시즈와 협업한 위대한 음악감독 버나드 허먼은 오슨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에서 음악을 담당했는데, 여기서 진짜처럼 만든 불완전한 오페라 <살람보>를 선보인다. 훗날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가 <살람보>를 실제로 녹음하기도 했다. 그후 허먼은 <싸이코>, <새> 등 히치콕의 전성기 시절 작품에서 음악을 전부 담당하면서 영화음악계의 거장으로 남게 된다. 영화와 오페라의 관계에서 볼 때, 허먼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작품은 <현기증>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이다. 두 작품 모두 명백하게 바그너의 오페라 스타일을 이용하고 있다. <현기증>은 마치 오페라처럼, 비극적인 이야기가 애절한 음악의 배경 위에 전개되는 멜로드라마다. 허먼의 음악이 너무나 아름다워 히치콕도 배경음악의 연주를 끊지 않고 화면을 구성할 정도였다. 허먼은 스코시즈가 아직 신예였을 때 작품만을 보고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도 작업했는데, 이 영화는 허먼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책속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어둡다. 달빛만이 세상을 밝히는 푸른 밤이 바그너의 시공간이다. 사랑도, 삶에 대한 열정도 모두 포기하고픈 유혹적인 밤이 드라마를 압도한다. 게다가 사랑을 절실하게 바라던 인물들이 그 사랑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런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마저 알 수 없는 죽음의 유혹에 바지곤 한다. 불같은 사랑은 마치 종교적인 의례처럼 죽음의 고요 앞에 자세를 낮추는데, 그 패배으 고통이 숭고의 지점에까지 도달해 있는 듯하다. 이른바 '바그너리언'(Wagnerian)들은 이런 식으로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든다.
루이스 브뉘엘도 바그너를 좋아한다. 데뷔작 때부터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끌어 쓴다. 1929년에 초현실주의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안달루시아의 개'를 발표하며, 그는 이 고전 무성영화의 피아노 반주곡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용한다. 지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안달루시아의 개'의 복원판에도 물론 바그너의 음악이 입혀 있다. 1930년대 두번째 작품인 '황금시대'를 발표하며, 이번에도 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용한다. 두 연인이 정원에서 '미친 듯' 사랑할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남녀 주인공이 그리스의 조각상 아래에서 격렬한 입맞춤을 나눌 때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죽음'의 멜로디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가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했던 사실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도 발견된다. 이번에는 '발퀴레'를 이용한다. 이렇게 그는 우연하게도 영화감독을 시작하며, 또 영화감독의 삶을 끝내며, '죽음의 작가'인 바그너의 음악을 자신의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