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에리히 프롬인가? 모든 게 범람하는 세상이다. 각종 콘텐츠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재차 공급되고, 이미지가 흘러넘치며, 그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과잉이다. 그 안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제 자신조차 과잉된 이미지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여피족, 보보스족 등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이름이 붙는 마당에 입고, 쓰고, 먹는 것은 모두 나라는 인간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나 자체이다. 이제 개성은 ‘몰개성’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야말로 ‘잇 아이템’으로 가득채운 ‘자아 쇼핑’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더 과잉된 세상 속에서 허우적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책 『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은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이 이루어 온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하며 자기 자신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제자 라이너 풍크의 내밀한 기록은 자기분석에 있어서 에리히 프롬의 사상과 학문이 가진 탁월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자기분석 여행에서 우리는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했을 때 우리는 인정하기 싫었던 치부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와 마주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이끄는 이 여행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1. 에리히 프롬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바뀐 한 정신분석학자의 내밀한 고백 책은 라이너 풍크가 프롬의 마지막 8년을 함께하며 배운 자기 자신과의 만남에 이르는 길을 내밀히 기록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저자의 존경 어린 시선을 쫓아가는 일은 프롬의 학문은 물론 그 배경이 되는 프롬의 삶까지 세밀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라이너 풍크는 프롬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사회라는 테두리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속에서 인간이 방해받지 않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프롬의 학문이 보여 주는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롬은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고,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진정 어린 모습을 보여 주었다. 프롬 자신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뛰어 넘는 자기실현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듯 삶이 곧 사상이었던 프롬과의 만남은 그의 내면이 생동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자신의 내면과 오롯이 만나고 싶게 했다.
2. 에리히 프롬의 자기분석이 제기하는 2가지 문제 프롬은 지난 20세기를 이끈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 받고 있는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잠재의식 속 뒤틀린 욕망을 다스리고 아직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펼치게 하는 데 평생을 바쳐 연구했다. 프롬의 자기분석은 지금껏 자신에 대해 당연하게 여겨 온 것들을 문제 삼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안에 숨어 있는 욕망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때 프롬이 제기하는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부를 향한 끝없는 열망, 공황에 가까운 휴대 전화에 대한 집착, 명품을 향한 소유욕 등을 통해 인간 욕망의 근원이 곧 사회에서 출발함을 보여 준다. 책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측면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내가 욕망하는 것들의 가치’를 자문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이성적으로 보이는 것에 뒤틀린 욕망이 내재한다고 지적한다. 프롬은 이를 ‘일상성의 병리학’이라 설명하며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고 그걸 바른 행동이라 할 수 없듯,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형태의 심리 장애를 앓고 있다고 그게 병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책은 지극히 당연하고 이성적인 것이 우리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강조하며, 지극히 당연한 ‘나’로 받아들이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감춰진 욕망과 마주하고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바로 보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3. 나를 아는 것은 모두를 아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외부와 내면의 현실을 둘러싼 기만과 속임수를 밝혀내며 온전한 자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끈다. 자기분석이 이 같은 거짓을 밝혀냄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환멸과 실망을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와 세상이 처한 현실을 직시했을 때, 그제야 내 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힘이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켠다. 프롬이 ‘일차적인 성향’이라고 칭하고 확신했던 인간의 고유한 힘은 ‘성장’을 향한 열망이다. 책은 비오필리에(생명에 대한 사랑), 생산적 성격 지향성 등의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성향을 막힘없이 꽃피우는,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몸과 마음, 정신의 성장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사람은 타자의 힘에 의존하는 일 없이 확고하고 견고하게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자립성은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상상하고 행동하면서 인생을 개척하게 만든다. 인간 스스로 마침내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 성장을 지향하는 ‘신드롬’을 빚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능을 욕심과 충동의 차원이 아닌, 성장의 에너지로 보았기에 프롬의 자기분석에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제안하는 것뿐이다.’ 책의 불친절함을 고백하는 프롬의 이 말은, 오히려 자기분석서가 해야 할 최선의 역할을 담고 있다. 직접적인 제언이나 ‘how to’를 원한다면, 그것은 디지털 기기에 기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에 기대는 나약한 자아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책속에서
'인간의 성공'이라는 말은 프롬에게는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핵심부터 간단하게 말하자면, 프롬은 인간이 건강한 정신을 지닐 때 성공한다고 봤다. 인간은 언제나 사회화한 존재이므로, 그가 말하는 정신 건강이란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가슴에는 두 개의 영혼이 둥지를 틀고 있다. 두 영혼은 각각 그에 상응하는 성격 지향성을 갖는다. 하나는 개인인 인간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다. (125쪽, '나는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