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표제: Boyhood : scenes from provincial life "J.M. 쿳시 연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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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옮긴이의 말 J. M. 쿳시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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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쿳시의 모든 기법과 힘을 동원해 써내려간 그의 소년 시절” <선데이 타임스>
한오라기의 감상도 없이 잔인하고 절박하게 써내려간 순수와 욕망, 고통과 쾌락, 사랑과 증오의 어린 시절과 성차별, 인종차별, 식민주의, 독재, 폭력으로 얼룩진 남아프리카
“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본문 중에서
‘우리 시대 가장 과묵한 작가’ 쿳시의 삶과 철학,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모든 근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소년 시절』은 작가가 자신의 과거를 아름다운 무지개색으로 채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종족차별로 얼룩진 남아프리카 역사에 얽힌 삶의 한 자락을 현재화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정치적, 윤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 쿳시의 위대성은 이처럼 가족사와 자신의 성장기에 관련된 사적인 공간에도 윤리성, 역사성, 정치성, 문학성을 가미할 수 있는 놀라운 진실성에 있다. 2002년에 발표된 『청년 시절Youth』과 더불어 『소년 시절』이 쿳시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때로는 비정하다고 생각될 만큼 매몰차게 감상이 배제된 투명하고도 정직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부커상 2회 수상에 빛나는 ‘남아프리카의 대가’이자 ‘존재의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작가’ J. M. 쿳시의 자전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쿳시 자전소설 3부작은 ‘우리 시대 가장 과묵한 작가’로 불릴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쿳시가 자신의 삶과 철학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모든 근원을 잔인할 만큼 솔직한 서술, 검소한 동시에 응축되고 폭발적인 문장으로 쏟아낸 회고록이자 소설이다. 3부작 중 첫번째인 『소년 시절』은 쿳시가 성차별, 인종차별, 식민주의, 독재, 폭력으로 얼룩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낸, 순수와 욕망, 고통과 쾌락, 사랑과 증오의 성장기를 다뤘다.
『어린이 백과사전』에 따르면, 유년 시절은 초원의 미나리아재비와 토끼들 사이에서 놀거나 난로 옆에서 동화책을 읽는 데 몰두하는 순진무구한 환희의 시기다. 그의 유년 시절과는 전혀 다르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그가 우스터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유년 시절이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하는 시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주지 못한다. _본문 중에서
쿳시는 유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낭만적인 색깔을 덧씌우거나 감상적인 평가를 얹지 않는다. 잔인하고 절박해 보일 만큼 한 오라기의 감상도 없이,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 당시 사회를 응시할 뿐이다. “『소년 시절』의 10분의 9에 해당하는 부분의 진실을 증언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작가의 말을 방증하듯, 『소년 시절』은 자신과 자신의 어린 시절, 혹은 그 무엇에 대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진실을 향해 치열하고 집요하게 나아가는 작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우리 어머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를 위해서 쓰겠습니까!”
2003년 12월 7일, 천오백 명의 축하객이 모인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노년의 쿳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머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를 위해서 쓰겠습니까!”자신의 사생활이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거의 전설적이다시피 한 쿳시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와 동생을 위한, 아니 특히 그를 위한 그녀의 맹목적이고 압도적이면서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그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든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는 그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따라서 그도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강요하는 논리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쏟는 모든 사랑을 결코 갚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생 그런 사랑의 빚을 안고 허덕일 것을 생각하자 몹시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_본문 중에서
이 여인은 그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목적만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그는 믿고 싶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그녀에게는 그가 태어나기 전의 삶, 그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삶이 있었다. 그녀 인생의 어느 시점에 그녀는 그를 낳았다. 그녀는 그를 낳고 그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그를 낳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고, 따라서 그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_본문 중에서
『소년 시절』의 화자 쿳시는 어머니의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끝없이 신뢰하고 갈구하면서도 거기에 알 수 없는 압박과 부담을 느끼며 벗어나고 싶어하고, 또 그 사랑이 언젠가 효력을 다하지 않을까, 어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쿳시는 어머니의 사랑마저도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그 담담함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어린 쿳시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미묘하게, 때로는 갑작스럽게 변화하고 성장한다.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품을 떠날 날만을 고대하던 십대 소년은 세월이 흘러 더이상 어머니가 곁에 없는 시간들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과 희생의 정신, 삶을 마주하는 방식과 태도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을 맴돌고, 그는 『소년 시절』을 통해 어머니를 추억한다.
“남아프리카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남아프리카인, 진짜 남아프리카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쿳시의 작품세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공간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마이클 K』 등 다수의 작품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곳의 자연, 역사, 정치, 문화, 사회문제는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특히 『소년 시절』에는 1950년대 혼란스럽던 남아프리카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남아프리카는 여전히 식민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한 상태였고,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여파로 시름했으며, 민족주의 독재정권이 권력을 장악했고, 오랜 시간 이어진 인종차별로 병들어 있었다. 쿳시는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시대의 혼란을 어렴풋하지만 함축적으로 그려냈다. 『소년 시절』에 담긴 남아프리카는 그의 다른 소설들에 나오는 성, 인종, 식민주의, 폭력에 관한 담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48년에 공포된 말란 박사의 첫번째 법령을 잊지 않고 있다. 캡틴 마블과 슈퍼맨 만화를 모두 금지하고, 동물이 나오는 만화와 사람을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화만 세관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한 법령이다. _본문 중에서
쿳시는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아프리카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쿳시’라는 성 또한 남아프리카에서 아주 흔한 아프리카너 성이다.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아프리카너 출신에도 불구하고, 쿳시는 아프리칸스어가 아닌 영어로 교육받았으며 아프리카너에 소속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프리카너보다 원주민과 그들의 아름다움을 동경했고 아프리카너가 만들어낸 식민사관과 편견에 어딘가 모순이 있음을 직시했다. 자신의 출신과 이름에 딸린 원죄 때문이었을까, 쿳시는 남아프리카 땅의 진정한 주인임에도 차별당하고 고통받는 원주민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작품을 통해 원주민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해체하고자 했다.
“오직 그만이 생각하도록 남겨진다.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모든 책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에 간직하게 될까? 그가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할까?”
“너, 거기서 뭐해?” 친구가 물었다. “생각하지.”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난 생각하는 게 좋거든.” 곧 같은 반 아이들 모두가 그걸 알게 되었다. 새로 온 아이가 이상하고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 실수를 통해 그는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신중해진다는 것은 언제나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적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_본문 중에서
그는 더 어두운 것에 관해 쓰고 싶다. 일단 그의 펜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엎질러진 잉크처럼 주체할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엎질러진 잉크처럼, 고요한 물의 표면을 질주하는 그림자처럼, 하늘을 가르는 번개처럼. _본문 중에서
『소년 시절』은 한 작가의 시작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쿳시는 『소년 시절』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모든 사람과 일상의 단면들, 그리고 그 시절의 자신을 곱씹는다. 또래 아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생각이 많으며 어딘가 평범하지 않았던 아이, 서서히 영혼의 어둠과 욕망에 눈을 떠가며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히곤 했던 그 아이는 초등학교 영어 수업시간에 작문을 하며 “더 어두운 것에 관해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아프리카 사회의 모순과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직시하고 사유하던 아이는 후에 “서구 문명이 기초하고 있는 잔인한 합리성을 해체하고 인간의 심리를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도 있게 해부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소설과 회고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잔인할 만큼 자기고백적이고 폭로적인 화자, 지독히도 신랄하며 직설적인 문체, 절박하고 집요한 사유의 정점을 보여주는 『소년 시절』은 “쿳시의 모든 기법과 힘”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속에서
그들은 우스터시 외곽의, 철도와 내셔널 로드 사이 공영주택단지에 산다. 그 단지의 거리 이름들은 나무 이름에서 따왔지만 정작 나무는 없다.
[P. 19] 그는 망가진 느낌을 받는다. 그의 내부에서 계속 무언가 서서히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벽이랄까, 막이랄까. 그는 그 부서짐을 테두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 가능한 한 자신을 꼭 그러안으려 한다.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테두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 아무것도 그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P. 46] 언제나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 조만간 비밀에 부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