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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숙의 농구 인생

제1부 산동네서 키운 타극마크의 꿈
은퇴경기서 중국 대파하다
포인트가드와 나의 삶
나락으로 떨어진 어린 시절
“엄마, 나 농구선수 됐어!”
박신자를 롤 모델로 삼다
한 우물을 팔래요
너무나 억울했던 편파판정
연습벌레로 지내다
버스비 20원과 과자 한 개의 유혹
성경구절을 외우며 다닌 등하굣길
청소년 대표로 태극마크 달다

제2부 영광과 좌절, 그리고 연애
태극마크 달고 모스크바로
고려인과 조선족의 이주 역사
“여편네 없는 박정희 괴뢰도당”
잊고 싶은 한일전의 악몽
바스켓볼의 탄생과 한국농구
한 골에 땅을 친 몬트리올 프레올림픽
출국 하루 전 손가락 탈골
이탈리아 미국 전지훈련
깡총한 바지의 촌스러운 남자
새벽길의 북동 횡단
신동파의 ‘빳다’ 세례
족두리 쓰고 중공을 연파하다
김 기자, 장수가 탄 말을 쏘다!
열성팬들
천호대교 투신소동
미수에 그친 눈밭에 업어치기
서울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상>
개막전 패배의 충격
서울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중>
75%의 슛 정확도로 미국을 격파하다
서울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골득실 차로 놓쳐버린 우승의 꿈
스포츠 강국을 일군 태릉선수촌
김 기자의 철야전투 첫날
“자네가 뭔데 내 딸을 데려간다는 거야.”
김 기자의 철야전투 둘째 날
“그냥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잊어주시오.”
김 기자의 철야전투 셋째 날
마지막 자존심을 건 최후의 승부
모스크바 프레올림픽의 회한
세계 베스트5
체육연금 농구 1호
호리덕(胡利德) 감독과의 인연
그리운 아버지

제3부 긍정과 지성(至誠)으로 지킨 가정
신혼여행에서 있었던 일
밥을 태우는 여자
엄마가 되다
다섯 집의 인연
두 번째 출산에서 쌍둥이 낳다
아이 셋 키우기
늑막염에 걸리다
봉사활동
남편의 노조활동
미국 연수와 자동차여행
가정 최대의 위기 -①
청천벽력의 간암 판정
가정 최대의 위기 -②
색전술 치료
가정 최대의 위기-③
겁쟁이 남편
가정 최대의 위기-④
“누군데 이렇게 시끄러우냐”
가정 최대의 위기 -⑤
70시간 같았던 7시간의 수술

제4부 다시 농구장으로 돌아오다
22년 만의 귀환
선수촌장 선수단장
대표팀 구성의 갈등
뜻밖의‘女 포청천’제안
심판위원장 24시
아들 셋 얻고 할머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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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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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가드 3관왕의 기록

강현숙의 포지션은 포인트가드다. 농구에서 포인트가드는 경기장에서 공수의 지휘자 역할을 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한국 여자농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가드였던 강현숙의 기록은 그래서 더욱 값지다.
그는 특히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불우한 환경에서 보내 자칫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위험을 밤에 잠을 잘 때도 농구공을 안고 자는 미칠 정도의 열정으로 국가대표의 꿈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궁핍하기 짝이 없던 산동네에서 태극마크의 꿈을 키워 마침내 국가대표가 되고, 8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활약했으며, 국가대표 주장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농구인생의 금자탑이라고 할 만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처럼 뛰어난 선수이면서도 우쭐하거나 모나지 않고 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다정다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다음에도 포인트가드로서의 책임감으로 가정의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가정주부의 귀감이 되고도 남을 성싶다. 그리고 이제 다시 농구장으로 돌아와 한국농구를 위해 남은 열정을 쏟는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강현숙의 인생은 포인트가드 3관왕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아울러 셰익스피어의 연극 같은 사랑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보너스 같은 재미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인생을 진솔하게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여자농구의 한 시대를 꼼꼼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공적인 역사로서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한국 여자농구의 전성기를 빛내다

한국 여자농구의 전성기가 언제였을까?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국민의 환호와 사랑을 받던 시기가 바로 강현숙이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던 무렵과 맞물린다.
강현숙이 1972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제2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 여자부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강현숙의 농구인생이 꽃을 피우는 출발점이었다. 1973년 한국일보 신인체육상 최우수 장려상을 수상하고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1980년 은퇴할 때까지 8년 동안 줄곧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대회 동메달(1973), 제5회 서울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 1974) 우승,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2위, 제7회 콜롬비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1975) 5위, 제6회 홍콩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 1976) 2위, 1978년 제7회 쿠알라룸푸르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ABC) 우승과 제8회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 1979년 제8회 서울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2위, 1980년 제8회 홍콩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1979년 제8회 서울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불가리아에서 열린 모스크바 프레올림픽에서 두 차례 세계 베스트5로 선정되었고, 체육훈장 기린장, 백마장, 거상장을 차례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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