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 / 김승옥 -- 중세소설 / 김학찬 -- 시에스타 / 윤이안 -- 준 / Sooja -- 로그아웃월드 / 박생강 --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인한, 가려움증에 의한 / 이하루 -- 아빠는 오늘을 좋아합니다 / 강병융 -- 가라아게 금지령 / 김민정 --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하여 / 전혜진 -- 야행 다시 만들기 / 곽재식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0년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되었음
연계정보
외부기관 원문
목차보기
프롤로그_100년의 통찰 〈SF김승옥〉을 만나다
59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_김승옥 중세소설_김학찬 시에스타_윤이안 준_SOOJA 로그아웃월드_박생강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인한, 가려움증에 의한_이하루 아빠는 오늘을 좋아합니다_강병융 가라아게 금지령_김민정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하여_전혜진 야행 다시 만들기_곽재식
의 출발은 오래된 신문 한 장이었다. 1970년 4월 1일, 당시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한 일간지 신문에 한 편의 SF소설이 실렸다.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이란 제목의 소설은 발표 된 50년 후, 즉 2020년을 배경으로 쓰였다. 1970년 SF 소설에 나오던 신인류가 바로 지금의 우리였던 것, 그 한 조각의 신문에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빛나던 한 작가의 통찰력이 담겨있다. 2020년의 후배 작가들은 50년 전 선배 작가의 소설을 기리고자 다시 50년 후인 2070년을 상상하며 100년의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SF 김승옥》을 기획하게 되었다.
2020, 김승옥을 아시나요?
<무진 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을 발표하며 1960년대 문학계를 풍미했던 소설가. 1970년대 <안개>, <겨울여자>, <충녀> 등의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인. 1980년, 신군부의 잔인한 학살극에 과감히 펜을 꺾어버린 지식인, 그가 바로 작가 김승옥이다. 일찍이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와 함께 무수한 명작을 남긴 김승옥은 언제부턴가 대중에게서 잊힌 작가가 되었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말과 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다큐멘터리 <김승옥 무진>을 제작해오던 제작진은 우연히 그가 50년 전에 이미 SF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청년 김승옥이 보내온 타임캡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2020년을 살아가는 후배작가들은 그를 오마주한 SF소설을 써서 선배를 기억하고 다시 50년 후를 상상하는 미래 여행에 동참한다.
내용 및 특징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에는 연료 전지로 가는 자율주행 자동차, 화상 통화, 인공자궁 등이 소재로 다뤄진다. 2020년인 지금도 너무나 핫한 소재들이다. 주인공 기자가 타는 자율주행 자동차 이름은 ‘귀요미19’다. 귀요미는 작품에서 밝혔듯 귀염둥이에서 발생한 단어로 작가 김승옥이 처음 지어 쓴 이래 지금까지도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마치 30살의 청년 김승옥이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후, 2020년으로 날아와 겪은 경험담을 쓴 듯 생생하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인간에 대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주변 환경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과 고민이 담긴 작품이다.
준 또는 D.π.9 그의 부모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은 ‘준’이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인 그에게 사(社)에서 붙여준 이름 또는 호출번호는 ‘D.π.9’, 1990년생, 금년 나이 서른. 아내와 네 살짜리 딸과 함께 관악 제27 아파트 단지 사십 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디 파이 나인, 뭘 하고 있어? 범인이 체포된 걸 모르나? 멍청한 표정이나 짓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야!”
<중세소설>의 김학찬 작가는《소설 도쿄》에서 도쿄로 하루키 작가를 만나러 무작정 떠나는 신인 작가의 시점으로 유쾌하게 도쿄를 그렸다면 이번에는 중세소설을 연구하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혹은 여전히 소설을 쓰는 작가 본인의 관점으로 진지하게 소설에 대한 ‘변명’과 소설을 쓰고 혹은 연구하는 자의 고민과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시에스타>의 윤이안 작가는 최근작《별과 빛이 같이》에서 20대 동년배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 고통과 치유를 주제로 작품을 써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근 미래 감정이 없고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외계인 부모’를 추적하는 수사관 딸을 등장시켜 은유로서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에 대한 가슴 아픈 지적을 하고 있다.
《소설 제주》《소설 뉴욕》에서 만났던 SOOJA 작가가 이번에는 김승옥 작가를 오마주한 <준>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 작품에 등장했던 ‘준’ 캐릭터를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내세워 ‘준’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비밀을 파헤쳐간다. 인류가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를 근 미래에 준은 하나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준의 비밀을 만나본다.
<로그아웃월드>의 박생강 작가는《소설 뉴욕》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밤색머리 소녀를 통해 1970년대의 뉴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면 이번에는 2040년 국제 평화의 도시가 된 파주로 안내한다. 견학을 가게 된 고등학생들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미래 도시 파주. 그들이 파주에서 맞이하게 될 로그아웃월드는 어떤 세상일까?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인한, 가려움증에 의한>의 이하루 작가는 모두 방독면을 쓰고 다니고 인육거래가 허가된 근 미래를 그린다. 주인공 윤은 그저 파트너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굳은 일인 ‘시체처리반’에서 일하며 옛날 물건들을 수집해서 건넨다. 인육이 원인 불명의 질병에 좋다는 이유로 시체강탈전이 벌어지는 파국으로 치닫는 근 미래에서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빠는 오늘을 좋아합니다>의 강병융 작가는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설 속 화자로도 등장한다. 동료교수와 환담을 나누거나 교실에서 학생들과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들, 그리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그의 일상은 어느새 그 물리적 공간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미래에서 현실로 불러들인 2020년의 현재, 작가는 그 일상을 그리워한다.
《소설 도쿄》의 김민정 작가는 씩씩하게 도쿄 거리를 걷는 ‘리의 여정’을 통해 그녀가 만난 여러 이성들의 편력을 유쾌하게 보여줬다. <가라아게 금지령> 속에서 ‘리’는 기자로 다시 등장한다. 노인의 인구가 절대적으로 늘어난 일본은 ‘노인세’와 ‘가라아게세’를 도입하여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려고 한다. 이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한인사회가 반대에 나서면서 한국인 ‘리’ 기자가 취재에 나선다. 왠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일본의 근 미래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섬뜩하다.
전혜진 작가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딸 승옥은 달의 이면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구로 귀환한다. 고집불통으로 신문물을 거부한 한 탓에 뇌손상을 입은 아버지를 탓하는 딸 승옥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마지막을 위해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된다.
곽재식 작가의 <야행 다시 만들기>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 현주가 김승옥 원작 각색의 영화 <야행>을 미래기술을 적용하여 다시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검열로 3분의 1일이 잘려나간 영화를 원작에 충실하게 만든다는 프로젝트인데 마치 근 미래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로 상세하게 과학적 기술이 묘사되고 있다.
《SF 김승옥》을 펴내는 이유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김.승.옥. 이라는 무한한 자산을 다시 한 번 점을 찍어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50년 전 깊은 통찰력으로 청년 김승옥이 우리에게 화두를 던졌듯 이제 우리들은 50년 후의 삶을 빗대어 인간과 우리의 삶에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2070년에도 100년 전 시작되었던 문학으로 고민하는 자의 깊은 통찰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속에서
[P.23~24] 50년 후, 디파이 나인의 기자의 어느 날 / 김승옥 ‘D?9’은 취재용 무선 전화기를 어깨에 메고, 팩시밀리에서 경쟁지의 사회면 몇 장을 찍어내 돌돌 말아들고 집을 나선다. 맨 아래층에 있는 진료실에 들러 간호원의 도움을 받으며 자동진찰기에 건강상태를 알아본다. 심전, 뇌파 등등 별로 이상이 없다는 카드를 자동진찰기는 토해낸다. “괜찮은데요 뭘.” 일흔 다섯 살인 간호원은 카드를 들여다보고 나서 묻는다. “무슨 꿈을 꾸었는데?” ‘D?9’은 꿈 얘기를 대강만 해준다. 간호원은 열심히 듣고나서, “우리가 젊었을 땐, 아이 꿈을 꾸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서 나쁜 일이 있다고 그게 얼마나 나쁘겠수. 불안해할 거 없어요.“ 그러나 현대라고 나쁜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직장으로부터의 해고 따위가 나쁠 건 없다. 그는 레이저광선 취급 면허도 가지고 있으니 하다못해 수마트라에 가서 벌목꾼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이란 있는 것이다. 가령......가령......? 그러고 보니 간호원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그래, 나쁜 일이란 별로 없군. 죽는다는 걸 제외하곤 말이야. 죽음, 그것은 과연 나쁜 일이다. 나도 죽게 될까?
[P. 37] 중세 소설 / 김학찬 중세인들은 컴퓨터를 두려워했습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신들이 제작한 것 따위에 공포를 느낀다니 자의식 과잉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의식 부족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우리가 잘 아는 갈등 덕분에 중세는 끝났습니다. 네, 나그네쥐 떼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달려가 차례로 집단 자살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 그대로, 무지 때문입니다. 중세인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몰랐습니다. 999년, 1999년 하는 식으로 그저 순차적인 숫자에서도 종말을 느꼈던 인간들이었습니다. 상상력 때문입니다. 태어난 날짜를 기념하는 관습도 있었고, 인간이 죽으면 특별한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모여서 음식을 나눠 먹거나 노래를 부르며 망자가 가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모이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고 위험하기만 한 행동입니다. 굳이 왜 모여서 전염의 위험을 감수합니까. 죽음 이후를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울면서 고통을 자처할 필요가 있습니까. 기뻐하거나 슬퍼한다고 나아지는 게 있겠습니까.
[P. 64~65] 시에스타 / 윤이안 나의 엄마, 그러니까 나를 낳아준 모체는 이시스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가 멀쩡히 제 기능을 하던 때였고, 대부분의 행성인들은 지구인 모르게 지구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는 지구에 놀러온 이스스인에게 속아 사기 결혼을 당한 것이다. 딱히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 같지는 않다. 이시스인답지 않게 호기심이 넘쳤던 엄마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즐겼고, 그 와중에 발견한 지구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지구인들이 하는 짓이 바보 같긴 하지만 재미있는 점도 있다고 낄낄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식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그리하여 열네 살쯤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나도 썩 그럴듯한 방식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그냥 궁금했던 거야. 지구인과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지구인이 될까, 나처럼 될까.” 엄마는 부정하지 않았고 불행하게도 나는 지구인의 특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태어났다. 어릴 때는 그래서 어쩌면 내가 엄마의 실패작이 아닐까, 오래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