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다. 보통 이 말은 마음에 상처를 겪고 난 후 성숙해진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아니라 무릎이 아파서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면서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다. 프로로 데뷔한 시점에서 불가피하게 한 수술이라 앞으로 선수로서 오래도록 활동하려면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나는 생각대로 잘 하지 못해서 경기가 시작되고 몰입을 하다보면 어느새 부상 부위를 조심해야 한다는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엄습하는 고통을 무시하며(?) 감각대로 움직이기 바빴다. 경기에 몰입한 덕에 승리의 여신은 내 주위에 머물렀지만, 그 덕에 나는 두 번의 수술을 더 해야 했다. 찢어진 연골을 잘라내고 봉합하는 수술과 뼛조각이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것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이제 오른쪽 무릎은 연골이 많이 없는 상태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몸 상태가 좋은 날이 있었다.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나도 왕년에는’ 같은 느낌이랄까. 과장해서 말하자면 왕년에는 정말 가볍게 점프를 해도 체육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있으면 모를까 천장에 닿을 것 같은 날은 없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덕분에 몸 관리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몸 상태에 미묘한 조짐이 느껴지면 바로 조취를 해서 바로 잡기도 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경기를 준비하면서 훈련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때그때 다른 몸 상태에 맞추어 유연하게 환경을 조절하며 준비된 상태를 만드는 것에 능숙해졌다.
잦은 수술과 부상으로 약해진 부위에 대해서도 특별 관리를 한다. 약한 부위에 계속 무리가 가면 상태가 악화되기 때문에 트레이닝으로 주변 근육을 보강한다. 그러면 약한 부위에 실리는 힘이 분산되면서 그 부분이 더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간단히 말해 이제는 내 몸의 장점과 약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고, 이에 맞는 맞춤형 훈련과 전략을 짜서 매일 기량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펄펄 날아다닐 것 같은 체력이 사라진 대신 수많은 경기를 헤쳐 온 연륜으로 상황마다 날렵한 감각을 세우며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어찌 보면 동물적으로 느껴지는 감각들이 그동안 쌓인 경험으로부터 나온 특별한 감각이라 믿으며, 나 자신만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렇게 관리를 해도 한번 부상이 생긴 부위는 경기 중에 갑작스럽게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치명적으로 경기에 방해가 된 경우는 없었지만, 불편한 통증이 찾아들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다.
가끔이지만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손으로 딱 때리려는데 순간, 어깨가 아파서 내가 보았던 틈새로 정확히 보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처음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조금 틀어서 공을 보낸다. 서브를 받을 때도 무릎에 통증이 일면 내가 원하는 만큼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고통은 한 번 시작되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한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딱히 방법이 없다.
‘어깨에 통증이 느껴지고, 지금 경기 상황은 어렵다. 내가 공격을 더 밀어붙이지 않으면 역전이 힘들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까지 뒤엉키면 몸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승부수는 흔히 말하는 정신력 싸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필코 이길 거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단 하나의 목표만 강렬하게 떠올린다. 단순하고 강력한 소망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온힘을 쏟아 부으면 통증은 점차 무시된다. 감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공이 눈앞에 날아오면 어느새 나는 힘차게 점프를 하는 것이다. 경기 영상을 되돌려 보면 통증이 있었던 순간이나 없었던 순간이나 별다른 차이 없이 무지막지하게 팔을 휘두르며 움직이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내 모습인데도 경기가 끝나고 보면 그걸 어떻게 버텼나 싶다.
나는 고통을 잘 참거나 무딘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엄살이 심한 편이다. 평소에는 종이에 손만 베어도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울상을 지으며 따갑다고 투덜거리기 일쑤니까.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면 부상 관리고 뭐고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거나 상대팀 코트를 향해 스파이크를 날리고 있다. 나로서도 이런 나의 이중적인(?) 모습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경기하는 그 순간, 코트 위에서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열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말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고 싶다.’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수많은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이기고 싶다는 열망은 항상 그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마음에 품고 있는 단 하나의 강렬한 목표를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온힘을 쏟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최고의 기술이라고.
"큰언니한테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