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p. 216-223)과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 관련 연표" 수록 방일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술·출판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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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어른거렸다 1장 내무성 건설대 출신 탄광 노동자 01 故 한재복…20 “비전향 장기수 보낼 때 국군포로와 교환이라도 했어야지, 맞교환이라도” 02 국군포로 A…40 “남한 정부가 인민군 포로를 석방해 우리가 못 왔습니다” 03 국군포로 B…62 “북한 땅에서 청춘을 다 보낸 게 너무 억울합니다.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04 유영복…84 “(국군포로) 하나도 안 데려왔지. 끝내 국가가 그걸 못 하더라고” 2장 내무성 건설대 출신 목공·공장 노동자 05 이대봉…108 “자식이 아버지를 원망해. 내가 항상 마음에 가책을 받는단 말이오.” 06 최기호…126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단 말이야. 내 솔직히 양심껏 온 거야” 3장 교화소 출신 노동자 07 김성태…148 “교화소에 있는 13년 동안 이 한 번 안 닦은 거 같네” 4장 인민군 출신 농업 노동자 08 故 국군포로 C…168 “자다 일어나서도 아들 생각에…그걸 계속 후회하지” 09 국군포로 D…188 “아들이 북한에 있어서 못 만나요. 그게 가장 슬프지” 부록…208 6ㆍ25전쟁 귀환 국군포로 관련 연표 참고문헌…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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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2013년 귀환 국군포로를 만났다. 국군포로를 취재하면서 이들의 증언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이판과 팔라우에 살았던 위안부를 비롯해 사할린 억류자들을 취재한다지만, 피해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는 할 일이 없다’며 절망하던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중략)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중략) 논문 계획안을 작성하려고 2016년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이천과 안산에 사는 귀환 국군포로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중략) 2020년 2월 20일부터 9월 25일까지 8개월 동안 귀환 국군포로 7명, 국군포로 자녀 2명, 국군포로 아내 1명, 국군포로 관련 시민단체 활동가 2명을 만나 가까스로 논문을 썼다. (중략) 나는 귀환 국군포로 11명을 만났는데 그중 9명에 대한 이야기만 책에 실었다.(8~10쪽) 현재 우리는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의 정확한 수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내가 만난 귀환 국군포로들은 5만~1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다른 그룹들은 또 다르게 예측하고 있다. 1953년 8월 7일 유엔군사령부가 발표한 <휴전에 관한 특별보고서>에는 국군포로와 실종자가 8만 2,318명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 정부는 1997년 10월, 4만 1,971명에 달하는 <6‧25참전 행불자(실종자) 명부>를 작성했는데, 이 인원에 미귀환 국군포로가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은 1950년 12월 30일 평양방송을 통해 국군 및 유엔군 포로가 6만 5,000명이라고 밝혔다. 그중 1만 3,469명이 송환됐으니 미귀환 국군포로는 5만 1,000여 명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사>를 통해 중공군이 개입한 후 생긴 포로가 4만 6,523명이며 그중 국군포로는 3만 7,815명이라고 집계했다.(12쪽)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해 얼굴도 공개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한 약속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르신들을 10년 동안 느릿느릿 인터뷰하면서 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에게 해주신 말씀을 잘 정리해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졌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이름도, 얼굴도 공개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한 약속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도리어 그 약속을 어기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르신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간 동료들 때문에 나에게 이 일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그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11, 12쪽) 기자 10명이 일주일이면 해낼 일을 기자 1명이 10년에 걸쳐 띄엄띄엄 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 생존자는 2023년 5월 현재 13명으로 줄어들었다. 애초에 나는 국군포로의 손을 잡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어르신들이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주셨다는 걸 알게 됐다. 그분들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던 기자가 꿈을 실현하려다 병이 나 백수가 됐는데, 그 꿈을 이루며 깊은바다 돌고래 출판사 사장이 됐기 때문이다. 기자 10명이 일주일이면 해낼 일을 10년에 걸쳐 띄엄띄엄 했을 뿐인데 이런 말을 해서 쑥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다.(14쪽)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다 나는 폭로하기 위해 귀환 국군포로들을 만난 것이 아니다. 실상을 고발하는 기사는 넘쳐난다. 보수주의자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을 알리고 싶어서 취재한 것도 아니다.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을 뿐이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13, 14쪽)
책속에서
[P.13]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둔 사람은 대부분 아들을 군대에 보낸다. 그럼에도 내가 “국군포로를 취재한다”고 하면 대다수 사람은 “너무 오래된 주제, 아무도 관심 없어 하는 주제를 취재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국군포로는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내 아들이 경험할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분들의 생이 다하기 전에 가공하지 않은 목소리를 책에 썼다. (중략)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두운 내용을 취재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분들의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었다. 나 역시 아들을 둔 어미이기 때문이다.-프롤로그 중에서
[P. 38] “제일 분한 건 비전향 장기수 넘겨받는 거 있잖아요. 막 가슴이 치고 올라오더라고. 통곡하게 되더라고 그때는. 북한이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김일성광장에 10만 명을 모아놓은 채 환영하고 훈장을 달아주고 그럴 때 생각이 다 같았을 거야. (중략) 남한놈들이 비전향 장기수라고 다 넘겨 보냈다고. 다 반역자들 아니야. 대한민국이 처리해야 할 놈들을 북한에 넘겼으니 그때 정말 분통이 터졌지. 남한놈들 생각도 안 했지. 우리 생각은. 순 공명주의자들. 자기 업적만 남겨놓고 어떻게 해보려고. 교환이라도 해야지 맞교환이라도. 간부가 많잖아요. 1709부대에도 간부가 많거든. 이런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맞교환할 수 있잖아.”-故 한재복
[P. 48] “포로를 알려면 이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 정부가 국제 사회에 가서 ”국군포로가 북한에 있다, 송환시켜달라“는 말을 못 해요. 국제법을 어겼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를 국회에 나가서 토론도 하고 많이 했습니다. 이건 국내 문제라서 정부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대한민국이 두 번이나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말을 못 한다 이겁니다. 처음에 (인민군 포로를) 석방했지, 그러면 국제법 위반이 아니에요. 하지만 해산시킨 거, 중립국으로 보내라는 그것도 안 했다는 거 아닙니까. 송환위원회에 한국도 처음엔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참여를 못 했습니다. 먼저 그렇게 해놓고 어떻게 달라고 하겠는가 말입니다.”-국군포로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