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원으로 이어지는 작은 횡단보도를 지날 무렵 빨래방에서 빨래를 한 아름 가지고 나오는 젊은 아가씨가 유독 눈에 띄었다. 모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는데, 그 아가씨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장 영감은 아가씨가 나온 빨래방 앞으로 갔다.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깔끔하면서도 정감 가는 글씨체가 박힌 간판이었다. 그 위에 노란 할로겐 등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상가 앞면은 위에서부터 성인 허리 높이쯤까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잘 보였는데 아래쪽은 상아색과 회색이 옅게 섞인 벽돌들로 촘촘히 이루어져 있어 편안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봄 햇살이 대형 세탁기가 돌고 있는 안쪽까지 깊숙이 내리쬐고 있었다. 창가 쪽에 놓인 나무 테이블에는 커피 머신이 올려져 있고 벽 한쪽에 위치한 낮은 책장에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빨래방이 무슨 도서관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하다. 세상 참 좋아졌네. 그렇지, 진돌아?”
진돌이는 대답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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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뒤척일 때마다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장 영감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이십사 시간 문을 연다는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이 스쳐 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싱글 사이즈의 이불이라서 김장 비닐에 알맞게 들어갔다. 장 영감이 진돌이와 함께 빨래방으로 걸어갔다.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연남동에는 낮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술은 힘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이제는 청주 두 잔도 버거워진 장 영감은 잔디 위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 맨땅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부러웠다. 진돌 이는 장 영감의 발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걸어갔다.
둘은 금세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앞에 도착했다. 유리창에서 보이는 자리에 진돌이를 잠시 묶어두려고 했는데 “반려 동물 동반 입장 가능”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함께 들어갔다.
장 영감은 이용법을 살폈다. 노인들도 제법 오는지 꽤 큼지막한 글씨로 자세하게 쓰여 있어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었다.
장 영감이 세탁기에 오줌 냄새가 나는 이불을 넣었다. 건조기에도 미리 이곳의 시그니처 향이 난다는 섬유 유연제 시트 두 장을 넣어두었다. 문 옆에 진돌이 줄을 고정해 놓은 장 영감은 책장으로 향했다. 읽을 만한 것이 있는지 고르려고 했지만 딱히 손이 가는 책은 없었다. 그래서 빈손으로 창가 앞 테이블 바에 앉았다. 나무로 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밤 열한 시가 넘은 공원의 풍경이 흥미로웠다.
“저게 다 추억이 되는 거지. 안 그러냐, 진돌아? 시간은 돈 줘도 못 돌리고 청춘은 억만금을 줘도 다시 오지 않아.”
얌전하게 앉아 있던 진돌이가 대답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네가 말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장 영감이 창밖을 보다가 테이블 위에 있던 연두색 다이어리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놓고 간 건가 싶어 한쪽 구석으로 치워놓으려고 했는데, 얼핏 보니 여러 사람의 손때가 탄 듯했다. 장 영감이 호기심에 다이어리를 펼쳤다.
첫 장 구석에는 “모두가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세상”이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뒷장까지 펜촉에 긁힌 걸로 보아 굉장히 힘을 주고 쓴 것 같았다. 연두색 표지로 된 그것은 시시콜콜한 일상이 담겨 있는 여느 다이어리와는 달랐다. 일 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간 달력에 빨간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11월 25일. 무슨 날이지?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인데 원래 주인 생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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