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 15~16] 작가·시인으로부터 생산되는 문학작품이란 비평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평은 문학작품을 전제로 하며, 심지어 그것을 먹이로 하여 생존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심하게 말한다면 문학비평은 작품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은 비평가의 해석과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비평은 다만 비평자의 몫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은 비평으로부터 독립적 관계에 놓인다. 비평이 간섭을 하건, 하지 않건 작품은 하나의 ‘격(格)’을 갖추고 지상(紙上)에 존재하는 이유에서이다. 이에 반해, 비평은 작품에 대해 지극히 의존적이다. 작품이 아니고선 ‘비평’이란 장르를 부지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비평을 위한 비평도 있지만, 그것도 작품 비평이 이루어진 이후에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지, 비평의 조건이 독단으로 성립하는 건 아니다. 한 작품이 비평에게 객체화되고 텍스트로서의 희생을 용인했을 때 비평은 바야흐로 논증을 진행할 수 있다.
[P. 166] 비유하여 설정컨대 ‘황금물고기’는 억압받고 가난한 시인이다. 시인으로 그런 의미를 되새긴다면, 농경 시대를 억세게 산 우리들의 어머니, 그들의 울음과 한의 노래가 그랬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질게 살아온 조상들의 삼킨 분노가 그랬다. 항쟁에 앞장선 극복자들이 겪은 암울한 민주주의의 피, 그리고 나라의 생태를 파괴한 대통령들 앞에서 촛불을 들던 시민이 그랬다. 이제, 우리의 상처투성이 ‘황금물고기’는 강과 바다에 이르러 평화의 공존 시대를 운위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나라[國家]다운, 문단(文壇)다운 시(詩)다운, 시조(時調)다운 치유의 물을 마시게 될 것인가. 천년을 구릿빛으로 견뎌 노래하는 황금물고기, 그래, 누가 뭐래도 희망은 힘차다! 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