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대표형(전거형, Authority) | 생물정보 | 이형(異形, Variant) | 소속 | 직위 | 직업 | 활동분야 | 주기 | 서지 | |
---|---|---|---|---|---|---|---|---|---|
연구/단체명을 입력해주세요. |
|
|
|
|
|
* 주제를 선택하시면 검색 상세로 이동합니다.
목차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 성주현 1
I. 머리말 1
II. 출생과 천도교 입교, 그리고 종교 활동 3
III. 3.1운동과 재만한인조국광복회에 참여 11
IV. 맺음말 26
■ 참고문헌 28
■ 국문요약 29
■ Abstract 31
박인진이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다. 박인진의 아버지는 호남 출신으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함경도로 은신하였다. 그는 박인진에게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박인진은 자연스럽게 동학을 이해하였고, 19세인 1905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교한 이후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도한 이후 갑산군교구 교역자를 시작으로 일생을 종교인으로 살았다. 갑산군교구 금융원으로 종교인의 길을 시작한 박인진은 갑산군교구 강도원, 풍산군교구 금융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3ㆍ1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교역자로서 그 책무를 다하였다. 특히 3ㆍ1운동 이후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할이라고 할 수 있는 갑산, 풍산, 삼수 그리고 만주 장백현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던 청년운동의 기반인 청년단체 조직에도 적극적이었다. 자신 또한 천도교청년당 풍산부의 노동위원으로 청년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인진의 종교적 활약으로 ‘영북 도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박인진은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의 최고 영수인 손병희를 비롯하여 주요 교역자들이 3ㆍ1운동에 참여하자 자신도 3ㆍ1운동에 참여 풍산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인진과 관련된 신문조서나 판결문이 없어 그이 역할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맹시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박인진은 3ㆍ1운동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중반 천도교단을 대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할 지역에 조국광복회 지회를 결성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천도교단에서는 친일로 경도되어가는 상황에서 조국광복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을 희생한 것은 적지 않은 갈등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로 인해 결국 박인진은 또 한 번 일경에 검거되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볼 때 박인진은 천도교를 통해 종교인으로서의 삶과 민족운동가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It was the his father’s influence that made Park In Jin enter the Chendo-kyo. His farther, was from HoNam, had a narrow escape from participating the Dong-Hak revolution and kept a low profile in Hamkyong Province. He told his the stories about Su-Wun Choi Jae-Wu and Hewol Choi Si Hyeong to his son as well as story of his experience, from these Park In Jin became understood the Dong-Hak naturally, and in 1905, when he was 19, entered the Chendo-kyo, sought to live a man of religion. After entering the Cheondo-kyo, he thoroughly lived a religious life, starting from a religious worker of the Kapsangun Diocese. He was a financier of Poongsangun Diocese as well as of Kapsangun Diocese while after 3ㆍ1 Movement he consistently carried out his responsibility to the fullest as a religious worker. Especially, he devoted himself to active in propagating Chendo-kyo after 3ㆍ1 Movement, and through this, expanded his influence to Kapsan, Poongsan, Samsoo and Changbai in Manchuria, which were under his control. Moreover, he organized actively the youth associations that were bases of youth movement leading to new cultural movement in 1920’s. He also participated in youth movement as a member of labor committee of Poongsan department of Cheondo-kyo youth party. As a result of his religious activities, he achieved the nickname of ‘YoungbukDoJeoung’. Park In Jin also participated in national movement as well as religious movement. He led the Cheer Movement in Poonsan, when Son Byeong-Hee, the leader of Cheondo-kyo, and main religious leaders participated in 3ㆍ1 Movement. Although we could not ascertain the role of these movement because of lack of examination records and written judgments, to a certain degree we find out the his role through Maen Si Jeong who participated in cheer movement with him. Park In Jin was sentenced to 1 year and 6 months in Hamheung Prison for participating in 3ㆍ1 Movement. In the mid of 1930’s, though he did not represent the party of Cheondo-kyo, he actively organized the branch of Fatherland Restoration Association in his area, uniting with Korean Fatherland Association in Manchuria. In the situation of inclining toward the trend of pro-Japanese, it was certain that there were many conflicts in Cheondo-kyo with self-sacrifice in the name of the independence. As a result, he again was arrested and killed by Japanese police. Park In Jin devoted his life to religious and national life through Cheondo-kyo.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목차 |
---|---|---|---|---|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과 동아시아 설탕무역 | 이은희 | pp.5-42 |
|
보기 |
1900년대 일본인의 조선이주 안내서 간행과 조선인식 | 최혜주 | pp.43-92 |
|
보기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연구 현황과 연구 과제 | 현광호 | pp.93-132 |
|
보기 |
20세기 초반 주요 중국 언론의 한국 독립운동 인식 : 홍콩 華字日報·天津 大公報·上海時報·申報를 중심으로 | 장세윤 | pp.133-171 |
|
보기 |
1920~1930년대 빈민실업문제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대응과 중국인 노동자 | 조영윤 | pp.173-218 |
|
보기 |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 성주현 | pp.219-250 |
|
보기 |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현황과 개선방향 | 오영섭 | pp.251-302 |
|
보기 |
1920년 원산독립운동 관련 자료 | 김형목 | pp.303-331 |
|
보기 |
번호 | 참고문헌 | 국회도서관 소장유무 |
---|---|---|
1 | 『천도교회월보』, | 미소장 |
2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미소장 |
3 | 『동아일보』. | 미소장 |
4 | 이돈화, 『천도교창건록』, 1934. | 미소장 |
5 |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천도교개요』 1, 1975. | 미소장 |
6 | 『세기와 더불어』 5, 조선노동당출판사, 1994. | 미소장 |
7 | 김창수, 「高麗革命黨의 組織과 活動」, 『汕耘史學』 4, 汕耘學術文化財團, 1990. | 미소장 |
8 | 在滿抗日獨立運動團體의 全民族唯一黨運動 | 소장 |
9 | 천도교 구파와 신간회 | 소장 |
10 | 장석흥, 「6ㆍ10만세운동과 통일전선운동」, 『국사관논총』 90, 국사편찬위원회, 2000. | 미소장 |
11 | 성주현, 「1930년대 천도교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연구 -갑산ㆍ삼수ㆍ풍산ㆍ장백현 지역의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0. | 미소장 |
12 | 성주현, 「일제하 만주지역 천도교인의 교육운동-동흥학교를 중심으로」, 『문명연지』 3-3, 한국문명학회, 2002 | 미소장 |
13 | 이동초 엮음, 『천도교회 종령존안』, 모시는 사람들, 2005. | 미소장 |
14 | 「천도교 제2회 대회 회록」, 『신인간』 55, 1932.5. | 미소장 |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전화번호 | ※ '-' 없이 휴대폰번호를 입력하세요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정기간행물실(524호) / 서가번호: 국내12
2021년 이전 정기간행물은 온라인 신청(원문 구축 자료는 원문 이용)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